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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펜으로 만들어지는 세상

입력
2017.08.3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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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게는 보물창고였다. 돈만 생기면 그곳으로 달려갔다. 어렸을 적에 말이다. 나는 상상력이 풍부했던 편이었고 만화 속 이야기들은 다른 세상으로 나를 불러냈다. 만화가게 가려고 돼지저금통의 배를 딴 적도 있었다. 엄마한테 딱 걸렸는데 만화 본다고 하면 혼날 것 같아 거짓말을 둘러댔다. 그땐 만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이제 만화를 보고 즐길 뿐이지만 이런 내가 그리 나쁘지 않다.

동네에 만화박물관이 있다길래 산책길에 들렀다. 애들이나 가는 데라고 대충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볼 게 많았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들었던 전설적인 만화들 앞에서는 반가운 마음에 전율까지 일었다. 만화가의 손놀림이 그대로 남아있는 원화를 보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만화가의 청년시대를 주제로 한 기획전시도 매력적이었다. 원로와 현역을 망라해서 만화가들이 20대 데뷔 시절에 그린 원화와 스케치가 전시되었는데, 나는 그냥 만화애호가로 남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한 그림’ 했지만 고수들의 그림은 열다섯 살부터 남달랐다. 만화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긴 만화가의 공책은 감동적이었다.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만화가들의 펜을 모아 전시해놓은 방은 이 박물관의 하이라이트가 아닐까. 만화가들이 사용했던 수십 개의 펜들은 종류도 다르고 사용 시기도 제 각각이었다. 볼펜에 펜촉을 끼워 사용하는 작가, 4b 연필로 그리는 작가도 있었고, 얇은 펜, 두꺼운 펜 등 종류도 다양하다. 컴퓨터용 타블렛 펜도 보이고 심지어 마우스도 있다. 펜마다 만화가의 개성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었다.

나는 ‘로트링 펜’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로트링 펜은 나랑 같은 시기에 건축과를 다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용했던 제도용 펜이다. 필요한 굵기마다 펜을 구입해야 했는데, 펜촉이 자주 망가지고 잉크도 잘 흘러서 애써서 그린 도면에 잉크가 떨어져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캐드 프로그램이 나오면서 로트링 펜은 사무실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저걸로도 만화를 그렸다니. 끝이 둥글고 펜의 굵기가 일정해서 만화에 적합하지 않을 텐데 어떻게 표현했을까 궁금하다. 아마 선이 단순한 깔끔한 만화였으리라. 같은 펜으로 어떤 사람은 만화를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도면을 그렸던 것이다.

건축가들에게도 ‘펜’은 중요한 도구이다. 대부분의 작업을 컴퓨터로 하는 시대지만 아직도 많은 건축가들이 펜을 잡고 설계를 시작한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편하고, 건축주와의 자리에서 즉석으로 계획을 하기도 좋다. 카페에서 심심할 때 냅킨에 스케치할 때도 펜만 있으면 된다. 현장에서 계획안을 변경할 때 합판이나 빈 벽에 연필로 스케치를 하기도 한다. 펜은 작은 도구지만 건축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용된다. 대부분의 건축학과에는 스케치 수업이 빠지지 않는다. 유명 건축가의 스케치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 그리기도 하고 수집품이 되기도 한다. 기술이 발달해서 많은 것이 대체되지만 사람의 손으로 하는 드로잉이 결국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다.

만화가에 대한 꿈은 접은 지 오래지만 다른 꿈인 건축가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펜으로 상상한 것을 만들어가는 점은 만화가와 비슷한 것도 같다. 펜을 쥐고 그리기를 시작하는 순간은 늘 떨림과 기쁨이 교차한다. 건축주를 만나고 땅을 답사하고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돌아오는 차안에서 조금씩 정리하고 그리하여 사무실에 오자마자 빈 종이를 펼치고 펜을 들어 첫 선을 그었을 때, 그리고 그 아이디어가 실현가능한 것을 확인했을 때 프로젝트의 첫 번째 기쁨이 시작된다. 그럴 때면 가장 간단한 도구인 펜으로 만드는 상상력의 세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때 내가 쓰는 펜은 300원짜리 플러스펜이다.

정구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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