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의 노동자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지음ㆍ김현지 이영주 옮김
갈무리 발행ㆍ304쪽ㆍ1만7,000원
여자의 가난은 거대한 비밀이다. 우리는 실직한 남자가 소주로 연명하는 다큐멘터리에 가슴 아파하지만 그가 소주를 사는 편의점 직원이 대부분 여자라는 것은 굳이 인지하려고 들지 않는다. 수많은 드라마, 영화, 노랫말이 비추는 건 가난한 여자가 아닌, 남자의 지갑에 빨대를 꽂고 편하게 사는 여자들이다. 그것이 익숙할 뿐 아니라 매우 유효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집 안의 노동자’는 20세기 초 미국 뉴딜 시대의 가족과 여성을 집중 조명한 책이다. 이탈리아 빠도바 대학 정치법학부 및 국제학부 교수인 달라 코스따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캠페인에 수십 년간 참여한 저명한 페미니스트 활동가다. 책이 처음 출간된 1983년 이탈리아에선 복지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저자는 근대 서구의 대표적 복지정책인 뉴딜을 다시 들여다봄으로써, 국가와 노동자가 어떻게 합의했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그 합의에서 은폐된 부분에 대해 이야기한다. 노동자들의 천국 아래서 돌아가는 거대한 톱니바퀴, 바로 여성과 가족이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제안한 1930년대 초반은 대전환기였다.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사회는 붕괴했고, 1,500만 명이나 되는 실업자가 길바닥에 나앉았다. 국가는 “단순 입법자”에서 “관리자”로 기능을 끌어 올려야 했다. 절망한 노동자들을 일으켜 직장으로 복귀시키고 다시 소비생활을 하게 하는 동시에 다음 세대의 노동자를 키워내야 했다. 국가는 이 재건작업을 함께 할 ‘파트너’로 여성을 택했다. 물론 무급이었다.
“주부와 경제는 실제로 다소 간접적이지만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장이 노동자 한 명의 노동력을 살 때, 노동자의 아내가 가진 노동력도 함께 사기 때문이다. (…) 주부는 광산이나 공장의 자본가 사장이 집에 있는 여성의 노동력을 지배한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보수를 주거나 인정해주지도 않으면서 그녀의 삶을 내내 움켜쥔 채로 말이다.”
저자가 인용한 1912년 ‘시카고 이브닝’의 기사는 가사노동이 무상으로 취급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한 중요한 자료였다. 그러나 가사노동에 보수를 요구하는 일은, 알다시피 1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요원하다. 이미 그때부터 가사노동엔 ‘엄마의 사랑’이란 이데올로기가 씌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청소해서 마지막 한 마리 세균까지 남김없이 죽이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아끼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쁜 아내, 나쁜 엄마가 되었다.”
뉴딜 정책 하에서 여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려는 시도는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됐다. 정부는 일자리를 만들고 실업수당을 지급하고 노동시간과 최저임금에 대해 논의했지만, 그 대상은 백인 남성이었다. 흑인은 복지 대상에서 자연스럽게 배제됐으며 여자는 살림 잘하는 법에 대해 교육 받았다. 의회는 1932년 한 가정 내 두 명이 공직에 고용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3년 간 1,000명 이상의 기혼 여성이 직장을 잃었다. 1933년 노동부 장관에 취임한 프랜시스 퍼킨스는 직장에 다니는 주부를 겨냥해 “부유한 ‘용돈벌이 노동자’는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라며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혹독하게 비난했다.
뉴딜이라는 혁신적인 복지정책은 노동투쟁의 산물이므로 그 수혜자는 남성 노동자여야 한다는 시선에 대해, 저자는 당시 여성과 흑인들의 투쟁양상을 상세히 그린다. 1937년 미시건주 플린트의 제너럴모터스 공장 점거 사태에서, 투쟁 지도부 중 한 명의 아내였던 제노라 존슨은 350명의 여성을 모집해 정부의 진압에 맞섰다. “우리는 남자들 둘레에 열을 지을 것이다. 경찰이 발포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우리에게 총을 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여성은 ‘합의’의 주체도 수혜자도 되지 못한 채, 쓸고 닦고 끓이고 달래는 일로 돌아갔다. 뉴딜이 가부장적이고 인종차별적 질서를 강화했다는 저자의 지적은 한국 사회가 마주한 복지 화두에도 시사점이 있다. 양질의 일자리를 통해 가계 소비를 촉진하고 이를 일자리 창출로 연결시킨다는 뉴딜의 골자는, 현 정부가 추진하는 복지정책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복지 정책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강화하는가.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