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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죽음의 진단명

입력
2017.08.2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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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날처럼 지루한 강의 시간이었다. 나이 지긋한 교수님은 국제질병분류표에 대한 설명을 하고 계셨다. 왠지 듣지 않아도 다 알 것 같은, 사무적이고 형식적인 내용이었다.

“ICD-10은 질병 및 관련 건강 문제의 국제 통계 분류 10차 개정판입니다. 세계 보건 기구에서는 국제적으로 일원화된 체계로 환자를 분류하기 위해 매번 개정판을 발표합니다. 여러분은 환자를 진료하고 이 체계에서 맞는 진단명을 찾아서 기입하면 됩니다. ICD-10은 세계적으로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22개의 다양한 카테고리로 되어 있으므로, ICD-10에는 ‘감기’나 ‘복통’ 같은 흔한 진단명부터, ‘전쟁행위’나, ‘핵폭발’, ‘아르마딜로에게 물림’ 같은 다소 의외의 진단명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갑자기 환자에게 ‘전쟁’이라는 진단명을 붙인다는 말에 학생들은 교수님을 잠시 바라보았다. 강의실이 느슨한 분위기에서 조금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 시선이 모이는 기색을 느낀 교수님은 약간 힘을 주어 그 다음 말을 이었다.

“여러분. 여기서 여러분께 질문 하나를 하겠습니다. 전 세계의 모든 의사가 ICD-10을 기준으로 자신이 진료한 모든 환자에게 진단명을 붙입니다. 그렇다면, 통계를 냈을 때,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환자를 죽음으로 이끄는 진단명 하나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이 진단명은 과연 무엇일까요. 참고로, 여러분의 선배 중에서 이 질문의 답을 맞힌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 진단명을 맞히는 학생에게는 특별히 가산점을 주겠습니다.”

교실이 웅성거렸다. 가산점이라는 말 때문인지, 한 학생이 손을 들어 분명 틀려 보이는 답을 외쳤다.

“암입니다.”

“아닙니다.“

다른 학생이 손을 들고 외쳤다.

“고혈압입니다.”

“아닙니다.”

“교통사고입니다.”

“당뇨입니다.”

“전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질문이 우리가 스스로 맞힐 수 없는 질문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질문을 낸 교수님이 답을 먼저 제시해주기를 침묵으로 기다렸다. 교수님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것은 바로, Extreme poverty, 극도의 빈곤. 한 마디로 가난입니다.”

우리는 순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고통 받는 일을 이해해야 합니다. 암, 고혈압, 당뇨, 전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하지만 세계에는 그런 질환을 앓을 나이까지 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의 진단명은 뭐라고 붙여야 할까요. 이 사람들을 전부 우리가 의학에서 정해놓은 잘난 진단명으로 죽었다고 분류할 건가요. 아니죠. 이 사람들은 가난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교수님의 말을 침도 못 삼키고 듣고 있었다. 교수님은 격양되어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은 이제 의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암도 치료하고 싶고, 고혈압도, 당뇨도 치료하고 싶겠지요. 사람들의 생명을 연장하는, 그게 멋있는 의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기억해야 합니다. 가장 많은 인류에게 고통을 주고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그런 병이나 질환이 아닙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입을 것이 없어서, 살 곳이 없어서 인간들은 죽어갑니다. 그런 병이 있는지도 모르고 죽는단 말입니다. 의사는 생명을 연장하기에 앞서 인간을 돌보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이 진단명을 일생 쓸 일이 없더라도,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수의 고통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하나의 진단명을 마음속에 새기고 기억하는 일이, 이 복잡한 학문을 떠나, 인간을 이해하는 한 명의 인간이 되기 위한 마음가짐이라고 믿습니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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