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몰락] “글로벌 세상의 무기인데… 소외계층 아이들 도와줄 영어사다리 절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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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몰락] “글로벌 세상의 무기인데… 소외계층 아이들 도와줄 영어사다리 절실해요”

입력
2017.08.2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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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귀국한 엄마와 경력단절 교사들

5년 전부터 아동센터 그룹홈 찾아 재능기부

영어교육협동조합 잉쿱의 조경현(오른쪽 끝) 이사가 22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잉쿱 사무실에서 신규교사들을 대상으로 교육과정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빙고게임의 빈 칸에는 알파벳이 들어갈 수도 있고, 영어 단어가 들어갈 수도 있어요. 교재에서 배운 짧은 문장을 써넣게 할 수도 있고요. 중요한 건 한 아이가 계속 이기도록 놔두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럴 땐 교사가 지고 있는 아이에게 슬쩍 반전의 기회를 줘서 ‘빙고’를 외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뒤처지는 아이가 없도록요.”

22일 서울 강남 테헤란로의 한 오피스빌딩.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영어수업 커리큘럼과 교수법 논의가 한창이다. 발표에 나선 신정분 강사의 과감한 ‘승부조작’ 권유에 여기저기 터지는 웃음꽃.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영어를 가르칠 수 있을지, 알파벳부터 파닉스, 리딩 교재, 스토리북 구연과 독후활동까지 다양한 노하우들이 오간다.

여느 대형 영어학원 워크숍 못잖은 이곳은 영어교육협동조합 잉쿱의 신규강사 교육 현장. ‘차별 없는 꿈, 공정교육’을 기치로 내걸고 소외계층 아이들에게 무상 영어교육을 실시하는 곳이다. 10년 이상 미국에서 살다 돌아온 ‘귀국엄마’들과 영어교사 출신 경력단절 여성들이 2012년 영어 교육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재능기부를 해오다 보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영어교육을 위해 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 저소득층 수급권자와 차상위계층, 조손가정과 한부모가정 아이들의 공부방 역할을 하는 지역아동센터와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그룹홈으로 찾아가 영어를 가르친다.

소외계층 아이들에게 무상 영어교육을 실시하는 영어교육협동조합 잉쿱의 안미하(오른쪽부터) 이사장과 김영정, 조경현 이사. 이들은 "알파벳도 모르던 중학생에게 주 1회 영어수업만 해줘도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며 "조금만 도와주면 공교육 안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아이들을 국가와 학교가 더 이상 방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돈 없으면 가질 수 없는 무기, 영어

“제가 1997년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가기 전 한국에서 엄마들이 ‘학원 스케줄 짜기가 너무 힘들다. 뺄 건 학교 수업밖에 없다’고들 그랬어요. 그 정도로 사교육을 많이 받았죠. 그런데 15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보니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해진 거예요. 소외계층 아이들은 정말 어쩌나 싶어 귀국엄마들이 잘할 수 있는 영어로 재능기부를 시작했는데, 현장에 가 보니 영어격차가 너무 심하더라고요.”

안미하 잉쿱 이사장이 처음 가르친 아이들은 그룹홈에서 생활하는 중1과 초6 여학생들이었다.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후 버려진 아이, 아버지는 교도소에 가 있고 어머니는 정신지체3급이라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 학교에선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치지만, 중학생이 되도록 ABC도 몰랐다. “그룹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독립해 나가야 해요. 얘들이 이 상태로 세상에 나가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너무 가슴이 아팠죠. 세상은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 것 같고, 어엿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라는데, 그 많은 세금은 다 어디로 간 건지, 왜 국가는 이런 아이들을 가르치고 보호하지 않는 건지 답답했어요. 제가 여기서 못 빠져 나가는 이유죠.”

노출과 사용이라는 두 원리에 따라 실력이 향상되는 영어는 사교육이라는 물량 공세에 가장 취약한 과목이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경민 교수와 석사과정 정재훈씨가 3년치 수능 결과 전수자료를 분석한 ‘교육의 공간 불평등 연구’(2014)에 따르면, 수능 영어 1등급을 받은 학생은 서울 강남구가 금천구보다 무려 22배나 많았다. 수학과 국어는 각각 6.1배와 10.7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사교육의 효과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 교육격차를 가장 크게 벌려 놓는 것이 영어임이 객관적 수치로 증명된 것이다.

안 이사장은 아이돌 스타가 꿈이라는 그룹홈 아이들에게 유명 걸그룹의 노래를 영어로 번역해준 후 함께 부르고, 때로는 ‘네 영어로는 동남아 공연 가서 인사말도 못한다’고 잔소리를 해가며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엄마강사들이라 아이들 구슬려 가며 공부시키는 데는 강점이 있다”며 웃었다. “축구선수가 꿈이라는 남자아이들에게는 유럽리그 가서 인터뷰 하려면 영어는 꼭 해야 한다고 동기부여를 해주면 효과가 좋다”고.

“우리가 영어를 엄청나게 잘하게 만들겠다는 게 아니에요. 이대로 놔두면 큰일나겠다 싶은 아이들을 만나면 가르치는 거죠. 점점 더 글로벌화되는 세상에서 영어는 무기 같은 거잖아요. 영어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세상에 나가서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를 아예 못 갖고 시작하는 거니까 저희라도 아이들에게 영어 사다리를 놔줘야겠다 싶은 거죠.”

영어교육협동조합 잉쿱의 김영정 이사가 서울의 한 공부방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잉쿱 제공

공교육이 내팽개친 아이들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조경현 이사는 초등 4~6학년 아이들을 1년 넘게 가르치며 놀라운 경험을 했다. 최대 8명, 통상 5명 정도가 수업에 오는데 처음엔 모두 실력이 비슷했다. 하지만 학습능력의 개인차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영어는 노출이 중요한데, 일주일에 한 시간 해서 얼마나 나아질까 처음엔 회의적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조차도 쌓이니까 상당하더라고요. 학습능력이 뛰어난 아이들은 빨아들이는 게 정말 놀라워요. 배운 걸 안 잊어버리고, 배우는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본인 스스로 흥미도 많이 가지면서 영어를 좋아하더라고요. 자신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거죠.” 조 이사는 “제일 떨어지는 학생조차 조금씩 배우는 기쁨을 느끼는 게 보이더라”며 “그런 면에서 보람이 컸다”고 말했다.

김영정 이사는 알파벳도 모르던 초6 여아를 지역아동센터에서 2년간 가르치면서 징검다리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알파벳부터 시작해 음가를 익히고 ‘be 동사’ 활용법과 시제를 배우면서 아이는 단어를 읽기 시작하고, 문장을 읽고 나름대로 자기 문장을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2년 되니까 이런 게 가능해지더라고요. 중학교에 가서는 학교수업을 따라갈 수 있게 됐어요. 아이가 ‘선생님, 저 영어 재밌어요’ ‘저 영어 할 수 있어요’ 이렇게 바뀌었는데, 정말 보람이 컸죠.” 김 이사는 “조금만 도와주면 다시 수업을 따라잡을 수 있는 아이들을, 그냥 외면한 채 학년이 올라가도록 두는 건 너무 무책임하다”며 공교육에서 탈락한 아이들을 다시 공교육 속으로 밀어 넣는 것, 그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게 우리 일”이라고 말했다.

영어교육협동조합 잉쿱의 안미하(오른쪽부터) 이사장과 김영정, 조경현 이사가 최근 공간기부를 받은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사무실에서 교육과정을 논의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영어 교육격차, 국가가 나서야

잉쿱이 재능기부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건 지속 가능한 무상교육을 위해서다. 강사들에게 소정의 강사료라도 지급되지 않으면, 장기간의 지속적 교육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자신의 시간과 재능뿐 아니라 때때로 사비까지 써가며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쉽게 지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만든 게 협동조합이지만, 100% 무상교육을 사업내용으로 하는 조합이 수익모델을 만들기는 어렵다. 개인 후원과 기업 펀딩으로 예산을 조달하고 있으나 늘 수요에 미치지 못한다.

“세상에는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 너무나, 정말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죠. 국가에서 예산을 지원하기 어렵다면, 이런 역할을 하는 부서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일을 할게요.” 안 이사장은 “국가와 학교가 외면한 아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가르치겠다는 게 우리가 모인 이유지만, 지속적 교육을 위해서는 저희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정부의 관심을 호소했다. 특히 교육공간이 있으면 더 많은 아이들을 모아 가르칠 수 있는데, 그럴 만한 곳이 없어서 안타깝다고.

조 이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의 수준차가 생기는데, 레벨별로 반을 나눠 가르치지 못하는 게 제일 어려운 점”이라고 말했다. “잘하는 아이들에 맞추면 못하는 아이들이 소외되고, 못하는 아이들에 맞추면 잘하는 아이들이 지루해 하니까요. 클래스를 쪼개서 수준별 맞춤 수업을 하면 좋을 텐데 그게 다 돈이잖아요.”

잉쿱은 다음달부터 소외계층 아동이 많은 초등학교 몇 곳으로 방과후수업을 나간다. 대기업 펀딩을 받은 덕분에 3년간 무상교육을 실시할 수 있게 됐다. 22일 열린 워크숍은 이 프로그램을 위해 선발된 신규 교사들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소외계층이다, 저소득층이다,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다, 이런 표현들을 절대 사용하지 못하는 게 저희 규칙이에요. 아이들이 그런 자각을 가지면 레이블링이 되니까요. 하지만 4학년이 넘어가면 아이들도 자신들이 사교육을 받기 어렵다는 걸 다 알죠.”(안 이사장)

“지역아동센터에서 가르친 뛰어난 학습능력의 남아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아이가 중2 말쯤 되니 벽에 부딪혀 괴로워하더라고요. 사교육 시장과는 아무래도 속도 차이가 크니까요.” 김 이사는 “가슴이 많이 아팠다”고 했다. ‘차별 없는 꿈, 공정교육.’ 잉쿱의 설립 취지에 누구도 이의를 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당연한 말을 국가도, 사회도, 학교도 아닌 경력단절 엄마강사들이 해야만 하는 걸까.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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