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는 입을 다무네
정미경 지음
민음사 발행ㆍ336쪽ㆍ1만3,000원
소설의 내용, 문장만큼이나 소설이 나오게 된 배경, 맥락이 중요한 작품이 있다. 결혼, 출산, 육아에 충실한 여자만이 인간으로 대접받았던 빅토리아 시대에 결혼제도를 집약한 ‘제인 에어’가 그러하듯, 수십 년 후 이 시대와 결별을 선언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이 그러하듯. 2017년의 시점으로 읽을 때 지극히 당연하고 유치한 선언들은, 작품의 시대와 작가의 생애를 알게 될 때 그 의미가 오롯이 완성된다.
올 봄 작고한 정미경의 유작 소설 ‘가수는 입을 다무네’ 역시 이 계보에 속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다만 시대적 과업을 집약한 앞의 작품들과 달리 작가 생전 쓴 마지막 장편소설이라는, 온전히 개인적인 맥락 안에서.
10년 째 슬럼프를 겪는 록 가수를 그의 아내와 대학생 이경의 시점으로 그린 작품은 화가 김병종과 결혼 후 30여 년간 아침이면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두 시간 넘게 문학과 예술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는 작가의 이력이 저절로 겹쳐 읽힌다. 제목은 기형도 시인의 동명의 작품에서 따왔다.
여기, 두 개의 세계가 있다. 사회 구조 안에서 열심히 발버둥치는 대학생 이경과 사회 구조 따위는 하등 상관하지 않고 제 삶을 사는 율. 정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직했던 이경은 2년간의 직장생활 후 대학에 들어가 기존 친구들과의 인연을 끊는다. 그리고 온갖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번다. 단지 시간이 맞는다는 이유로 선택한 교양과목의 기말시험은 30분짜리 다큐멘터리 제작. 다분히 소설처럼, 악착같이 사는 이경을 좋아하는 돈 많은 ‘남자 사람 친구’ 현수는 하필 또 록 밴드 멤버와 친구이고, 현수는 그 친구의 정신적 지주이자 한때 잘 나가던 가수인 율을 다큐멘터리로 찍어보라고 제안한다. 1,600만 화소의 최신형 카메라를 갖다 바치면서.
전설의 기타리스트 겸 보컬인 율은 밤마다 환영에 시달리다가 목소리를 잃고 조울증과 대인기피증만을 가진 어린이가 됐다. 이런 율의 곁에는 10년째 같이 사는 아내 여혜가 있다. 그 자신 예술잡지의 편집장이자 유방암을 앓아 한쪽 가슴을 도려낸 환자이지만, 율 앞에서는 그의 널뛰는 바이오리듬을 맞춰주고, 몇 시간이고 신작의 오선지를 보며 조언하는, 엄마이자 애인이자 정신적 동지다. 그러나 여혜 역시 율의 소리 없는 절규를 듣지 못하고, 그래서 그는 차라리 입을 다문 채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율의 마지막 여정을 과제 제출용 다큐멘터리를 찍게 된 이경이 담는다.
작가 자신을 세 인물로 분할해 놓은 듯한 소설은, 줄거리보다 인물들의 대사에 눈길이 간다. 노래를 만든 건 “언제나 폭발하는 영감의 한 조각을 낚아채는 거”라는 율의 자아도취나, 율을 지켜본 여혜가 “곡을 만드는 일은 영감과는 별개의 육체적 노동”이라고 단언하는 대목은 작가 자신의 집필 과정을 작곡으로 환치해 설명해놓은 듯하다.
작품에 발문을 쓴 문학평론가 김미현은 이 작품을 ‘작가 정미경의 삶 혹은 문학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예술가 소설’이라고 소개했다. ‘세상을 떠난 자들의 삶은 그 자체로 존중 받아야 한다. 더욱이 그것이 최선을 다한 예술가의 삶이라면 그 삶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단순하게 이해하게 된다. 이런 존중과 이해는 상투적인 것이 아니라 온당한 것이고, 과장된 것이 아니라 절실한 것이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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