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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남이가’…견제 없는 권력이 된 축구협회

입력
2017.08.2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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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 대한축구협회(이하 협회)는 6월 13일 카타르와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8차전 원정 때 프로축구연맹(이하 연맹)에 대표팀을 조기에 소집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했다. 연맹은 대표팀이 직행으로 월드컵 본선진출에 성공할 경우 10월(10.2~10)과 11월(11.6~14)에 있을 두 차례 A매치 데이(A매치를 치를 수 있도록 국제축구연맹이 정해놓은 기간. 이 기간에는 프로축구 경기를 할 수 없음) 중 한 번은 K리그가 양보를 받는 조건으로 수용했다. 1월 16일 연맹 이사회 안건에 ‘월드컵 본선 진출 확정시 A매치 기간(10월, 11월)을 K리그 매치데이로 활용’이라고 적시가 돼있다. 이 이사회에는 협회 안기헌 전무도 이사 자격으로 참석했고 결정 사항은 각 프로구단들에 회람됐다.

협회는 오는 31일 이란(홈)-9월 5일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9, 10차전을 앞두고 K리그에 또 조기소집을 부탁했다. 자칫 월드컵 진출이 물거품 될 수 있는 위기라 프로축구는 한 번 더 양보했다. 이에 따라 26~27일 예정된 K리그 경기를 뒤로 미뤘다.

범 현대가가 장악한 대한축구협회가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범 현대가가 장악한 대한축구협회가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하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협회 태도가 변했다. 협회는 10월, 11월 A매치 데이를 모두 쓰겠다고 한다. 각각 두 차례씩 모두 네 번의 평가전을 소화할 작정이다. 기자가 지난 1월 이사회 문건을 보여주며 어찌된 거냐고 묻자 협회는 “약속한 게 아니라 추후 협의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어 “우리도 올해 A매치 데이 내내 월드컵 최종예선이 벌어져 한 번도 협회 주최 평가전을 하지 못했다. 후원사들과 약속도 있어서 10월, 11월 A매치는 무조건 다 평가전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앞에서만 상생을 외치고 뒤에서는 프로축구를 ‘봉’으로 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결국 8월 26~27일 K리그 경기는 A매치 데이인 10월 8일 벌어진다. 대표팀은 이 기간에 유럽에서 두 차례 평가전을 가질 예정인데 K리거는 안 뽑고 해외리그 선수만 차출해 K리그에 영향을 미치는 걸 최소화할 방침이다. 얼핏 보면 협회-연맹이 ‘윈 윈’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10월 8일은 추석연휴 기간. 갑자기 K리그 경기를 치르게 된 구단들은 원정 교통편을 구하느라 야단법석이다. 예정에 없던 경기를 준비해야 하는 홈 팀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10월 8일 경기는 스플릿라운드(K리그는 각 팀이 33경기를 치러 1~6위는 상위그룹, 7~12위는 하위그룹으로 나눠짐) 전 마지막 경기다. 매년 이 때는 난타전이 벌어져 경기가 흥미진진했는데 올해는 추석이라 관중 동원이 어렵고 언론의 관심도 끌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프로구단들은 11월 A매치 데이 기간을 활용하고 싶어 하지만 협회는 “11월에는 우리도 유명 해외 대표팀을 안방으로 불러 흥행몰이를 하고 경기력을 점검해야 한다”며 요지부동이다.

이쯤 되면 연맹과 프로구단들이 나서서 협회의 이기주의를 질타하고 성토를 쏟아내야 정상이다. 이는 생떼가 아니라 프로축구가 당연히 찾아먹어야 할 밥그릇이다. 하지만 연맹과 구단들은 약속이나 한 듯 침묵하고 있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 대한축구협회 제공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 대한축구협회 제공
지난 해 7월 프로축구연맹 이사회를 주재하는 권오갑(맨 왼쪽) 총재. 프로축구연맹 제공
지난 해 7월 프로축구연맹 이사회를 주재하는 권오갑(맨 왼쪽) 총재. 프로축구연맹 제공

한국 축구의 구조를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2013년 나란히 취임한 정몽규 협회장은 현대산업개발 회장이고 권오갑 연맹 총재는 현대중공업 부회장이다. 권 총재는 작년까지 실업축구연맹 회장도 겸했다. 여자연맹도 현대 인사인 오규상 회장이다. 프로축구 구단 중 전북(현대자동차), 부산(현대산업개발), 울산(현대중공업) 등 세 팀의 모기업이 현대 계열이다. 수년 전부터 ‘범 현대가(家)’가 한국 축구를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이들은 ‘이심전심’으로 서로 밀어주고 당겨준다.

정몽준 전 협회 회장이 1993~2008년까지 16년 간 장기 집권할 때는 삼성이나 LG(GS), 포스코 등 프로구단을 운영하는 대기업들이 현대 독주를 어느 정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수원 삼성 단장 출신인 안기헌, FC서울 단장 출신인 한웅수 등 잔뼈 굵은 축구 행정가들이 꼬장꼬장 따져가며 협회 일방통행에 제동을 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하지만 지금 안 단장은 협회 전무, 한 단장은 연맹 사무총장으로 ‘내부자’가 됐다. 또한 현대를 제외한 대기업들이 프로축구를 외면하면서 최소한의 견제 시스템이 사라졌고 힘의 균형추는 무너졌다.

정몽규 회장은 처음 당선될 때 협회 한 해 예산을 3,000억 원대로 늘리고 여자축구와 풀 뿌리(유소년) 축구를 활성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작년 7월 재선에 성공했는데 협회 예산은 3,000억 원에 한참 못 미치는 2015년 774억, 2016년 839억이다. 협회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여자, 유소년 축구 예산부터 뭉텅뭉텅 깎였다. U-16, U-19 대표팀이 아시아 예선마저 통과하지 못하는 일이 수년째 반복되고 있다. 여자축구는 실업, 대학 팀이 연이어 해체됐다. 여자, 유소년 축구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정 회장은 국제축구연맹(FIFA) 평의회 의원에 당선되고 안방에서 개최한 U-20 월드컵을 무리 없이 치르는 등의 소기의 성과도 냈다. 하지만 공에 대한 찬사는 많아도 과를 지적하는 쓴 소리는 거의 없다.

협회는 지난 1일 정관을 개정해 회장을 포함한 협회 임원을 선출할 때 대한체육회의 승인을 받도록 한 조항 등을 삭제했다. 회장 임기를 기존 중임 가능에서 세 번 연임도 가능하게 바꾸는 큰 변화도 줬다. 그러나 정작 보도자료에는 체육회 승인 관련 내용만 넣고 3선 가능 부분은 쏙 뺐다. 언론들이 취재에 나서며 쉬쉬하려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자 뒤늦게 공개하며 “3선 연임 조항은 대단치 않다고 생각해서 포함하지 않았다”는 납득하기 힘든 해명을 내놨다.

건전한 비판이 실종됐다는 건 상당한 위험 신호다. 견제 없는 권력은 필히 화를 부른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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