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에선 10분 동안 3팀이 줄줄이 ‘좋니’
“좋으니 그 사람, 솔직히 견디기 버거워” 19일 오후 4시 40분 서울 서대문구 명지대 인근 코인 노래방. 한 고등학생이 청소년실 9번 방에서 가수 윤종신의 노래 ‘좋니’를 홀로 열창했다. 그로부터 10분 사이 노래방에선 각기 다른 방에서 ‘좋니’가 세 번이나 울려 퍼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좋니’를 부를까. 호기심에 주인 없이 운영되는 무인 노래방에서 30분을 기다려보니 남성 6팀 중 4팀이 ‘좋니’를 선곡했다. 홀로 노래방을 찾은 30대 택배기사부터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는 20대 남성 대학생까지 ‘좋니’를 찾은 이들은 다양했다. 4팀 중 3팀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좋니’를 불렀다. ’좋니’를 두 번이나 부른 뒤 노래방을 나온 전모(18)군은 “정통 발라드를 좋아해 요즘 ‘좋니’를 자주 듣는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힙합 곡이 쏟아지고 음원 차트에서 주목 받고 있지만 따라 부르기 어렵고 공감이 안 된다며 한 얘기였다.
요즘 노래방에선 ‘좋니’가 대세다. 노래방에서 사용된 곡의 횟수를 집계하는 가온차트에 따르면 지난 6월 공개된 ‘좋니’는 이달 둘째 주 노래방 차트에서 2위를 기록했다. 철 지난 옛 노래가 주로 불리는 노래방의 소비 패턴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인기다. “‘좋니’가 화려한 고음과 공감할 수 있는 가사 등 노래방 히트곡의 공식을 모두 갖춘 덕”(김진우 가온차트 수석 연구위원)이 크다. ‘좋니’는 떠나 보낸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다. ‘뒤끝 있는 너의 예전 남자친구’로서 ‘찌질함’을 품은 생활밀착형 가사가 큰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노래방에서 만난 택배기사 김모(35)씨는 “‘좋니’가 윤종신의 ‘부디’(1995) 같은 느낌을 줘 추억도 떠올라 즐겨 부른다”고 말했다.
워너원도 제쳐… 두 달 만에 음원 차트 1위 역주행
온라인 음악사이트도 ‘윤종신 천하’다. 윤종신의 ‘좋니’는 16일부터 22일까지 멜론 등 주요 음원 차트 1위를 휩쓸고 있다. ‘국민 아이돌 그룹’ 워너원의 신곡 ‘에너제틱’까지 제쳤다. 윤종신이 지난 6월22일 낸 노래로 음원 차트 역주행을 통해 일군 이변이다.
뿔테 안경을 즐겨 쓰는 중년의 발라드 가수가 돌풍을 일으킨 데는 ‘입소문’이 주효했다. 음원 공개 첫날 100위권에 턱걸이하며 외면 받았던 노래는 윤종신이 지난달 1일 KBS2 음악프로그램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하며 주목 받기 시작했다. 윤종신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애절하게 부른 영상이 온라인에 공개되자 조회 수는 바로 30만건을 웃돌며 입소문을 탔고, 음원 순위는 30위권으로 뛰어올랐다. 이후 일반인들이 ‘좋니’를 따라 부르는 영상이 유튜브에 쏟아지면서 온라인에 ‘좋니’ 열풍’이 불었고, 곡은 차트 1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윤종신의 소속사인 미스틱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윤종신의 차트 1위는 그가 1996년 낸 5집 ‘우’의 타이틀곡 ‘환생’ 이후 21년 만이다.
청와대서 울려 퍼진 ‘지친 하루’… “노래는 이야기” 작사가 윤종신의 저력
윤종신의 노래는 차트 밖에서도 재발견됐다. 17일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 기념 기자회견장에선 식전에 윤종신이 곽진언ㆍ김필과 함께 부른 ‘지친하루’(2014)가 흘러 나왔다. 음악의 메시지가 국민에 전달 되길 바란다며 청와대가 선택한 곡이었다. 이 노래엔 ‘옳은 길 따위는 없는 걸 내가 걷는 이곳이 나의 길’이란 가사처럼, 소신에 따라 실천하는 삶에 대한 응원이 담겨 있다. 윤종신 노래가 지닌 이야기의 힘이 재조명된 것이다. “어렵지 않은, 일상의 언어로 그림 한 폭을 그리듯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거나 현실을 솔직하게 담은”(배순탁 MBC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점이 ‘윤종신표 노래’의 장점이다.
감각의 수명은 짧고, 생각의 여운은 길다. 윤종신은 카카오톡 프로필에 ‘노래는 이야기’란 문구를 걸어뒀다. 그런 그의 작사에 대한 지론은 ‘순간을 기록하라’, ‘마음껏 그리워하라’ 그리고 ‘내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써라’다. ‘지친 하루’는 윤종신이 ‘내 사람들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쓴 노래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고 싶은 일이 ‘업’이 되도록 노력하자’는 바람을 담아 쓴 곡이라고 한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월간 윤종신’ 사옥에서 연 사진전 ‘달램-안성진X윤종신’에서 지난 6월 기자와 만난 윤종신은 “(작사 관련)책을 낼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좋니’ 음원 수익 ‘리슨’ 창작 지원금으로
윤종신과 10년 넘게 친분을 이어온 측근은 윤종신을 “앞길이 불안하더라도 도전을 즐기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2010년 3월부터 시작해 매달 신곡을 내는 ‘월간 윤종신’과 실력 있는 신인 가수들의 노래를 소개하기 위한 취지로 지난해 12월 선을 보인 음악플랫폼 ‘리슨’ 개설 등이 윤종신이 한 대표적인 모험이다.
매달 조용히 신곡을 내는 것에 대해 ‘자기 만족’이란 눈총이 쏟아졌다. 가수 보다는 예능인으로의 존재감이 점점 그를 채웠다. 윤종신도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눈치였다. 그는 “난 이제야 음악을 좀 알 것 같은데, 대중과는 점점 멀어져 간다”고 솔직한 고충을 털어놨다. 2015년 ‘월간 윤종신 2월호’로 ‘버드 맨’을 낸 뒤 한 말이었다. 곡은 과거에 인기를 누렸지만 잊혀진 배우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와 비슷했다.
7년 동안 찬바람을 견뎌낸 윤종신은 ‘리슨’의 10번째 주자로 나서 ‘좋니’로 데뷔 27년 차 가수의 저력을 보여줬다. 꾸준히 창작에 매달리며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은 결과였다. ‘좋니’의 제작비는 뮤직비디오를 포함해 774만원이 들었다. 영화로 치면 독립 영화 격인 이 음원은 블록버스터급 음원 수익이 기대된다. “볼빨간사춘기와 한동근 등 역주행 흐름을 타고 정상을 밟은 노래, 특히 발라드는 한 달 넘게 차트 정상을 장기 집권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김상화 음악평론가)이다. ‘좋니’로 열매를 맺은 윤종신의 다음 행보는 다시 창작 토양을 다지는 일이다. 윤종신 측에 따르면 윤종신은 ‘좋니’ 음원 수익을 ‘리슨’의 창작 지원금으로 써 후배 가수를 지원할 계획이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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