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뿐이라 말한다. 세상의 모든 풍경은 철저히 이미지를 소비하는 대상이다. 그 안에 어떤 생물이 살아가는지, 그 환경을 가꾸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했는지 묻지 않는다. 또 누군가는 여행에서 맛있는 음식을 빼면 무슨 재미냐고 묻는다. 입 안에 느껴지는 달콤함만 기억할 뿐, 어떤 식재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되고 가공되는지 따지지 않는다.
늦여름 주남저수지는 ‘볼만한 것’이 가장 부족한 시기다. 가창오리 떼의 화려한 군무도 없고, 드넓은 수면을 덮었던 연꽃 향도 시들어가는 때다. 이럴 때 여행은 본래의 목적에 한걸음 다가선다. 자극적인 즐거움만 추구하는 소비가 아니라,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다.
창원의 허파이자 생명의 창고, 주남저수지
주남저수지는 공업도시 창원에서 허파 같은 존재다. 공장과 주택이 밀집한 해안과는 산으로 막혀 있고, 낙동강과 맞닿은 대산평야 들녘을 넉넉히 적시는 물 창고이자 생명의 보고다.
저수지가 위치한 곳은 애초에 낙동강이 범람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물이 들고 나는 배후습지였다. 일제강점기인 1920~30년대에 9km에 이르는 4~5m 높이의 제방을 쌓은 후 동읍과 대산면의 홍수피해를 막고, 농경지에 용수를 공급하는 인공습지로 자리잡았다. 주남저수지로 통칭해 부르지만 실제는 동판저수지와 산남저수지 등 3개의 저수지가 제방으로 분리되고 물길로 연결돼 있다. 1980년대에는 해마다 약 10만 마리의 가창오리가 날아와 화려한 군무를 펼치면서 철새서식지로 더욱 널리 알려졌다. 공식적으로 국제습지협약(람사르)에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2008년 창원에서 열린 람사르 총회의 주요 무대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방문객이 많지 않은 18일 주남저수지 생태학습관에는 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한 아이와 부모들이 습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은 후 현장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철새 부리를 형상화한 종이모자를 쓰고, 손에는 뜰채 하나씩이 들여 있었다. 억새가 빼곡한 제방을 걸어 아이들이 도착한 곳은 연꽃 단지, 저수지 바깥 논과 맞닿아 조성한 체험장이다. 꽃은 이미 지고 없었지만 어른 키를 훌쩍 넘는 연 줄기와 넓은 잎이 작은 숲을 이룬 곳이다.
강사의 안내에 따라 아이들이 뜰채로 좁은 수로를 한번 훑자 왕우렁이가 서너 마리씩 걸려 올라온다. 송사리ㆍ물자라에 이어 장구애비ㆍ물깽깽이ㆍ물매미 등 생소한 수서생물까지 걸려 올라오자 아이들은 경쟁심이 발동해 송글송글 이마에 땀이 맺히는 줄고 모르고 채질에 열심이다. 쭉쭉 뻗은 연 대궁에는 분홍색 선명한 왕우렁이 알집이 시선을 잡고, 이따금씩 떨어진 연꽃 열매(연밥)에는 개배비들의 부리자국이 선명하다. 지저분한 뻘 밭으로만 보이던 수로에 이렇게 다양한 생명이 살아간다는 것에 동행한 부모들도 놀라는 눈치다.
제방에 설치한 탐조대로 자리를 옮겼다. 드넓게 펼쳐진 호수 위를 자연 발생한 연꽃이 가득 덮고 있다. 생태해설사는 초여름 극심한 가뭄으로 저수지 중앙까지 연이 번져 겨울 철새들이 내려앉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런 수준이란다. 겉보기에는 잎이 넓은 연꽃이 전부일 것 같지만, 사이사이에 가시연ㆍ어리연ㆍ자라풀ㆍ물달개비ㆍ마름과 생이가래 등 크고 작은 수생식물이 빼곡해 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살짝 스치는 바람 외에 어떤 움직임도 없는 적막한 풍경에 이따금씩 백로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저수지를 가로지른다. 그러나 탐조대에 설치한 망원경으로 보면 곳곳에 먹이를 노리며 하염없이 기다리는 새들이 보인다.
제방이 끝나는 곳에서 수로(주천강)와 연결된 농로를 따라 조금만 걸으면 주남돌다리에 닿는다. 약 800년 전 강 양쪽 판신마을과 고동포마을 주민들이 인근 정병산에서 암수 판석을 옮겨와 놓았다는 전설의 다리다. 현재 다리는 1996년 남아 있던 바위로 복원한 모습이다. 반듯반듯하게 정리한 대산평야에서 그나마 자연의 멋을 간직한 구조물이다.
사실 주남저수지는 제방 산책로를 깔끔하게 정비해 걷기는 편리하지만 자연스런 멋은 다소 떨어진다. 반면 바로 옆 동판저수지는 원시습지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판신마을 안 길로 접어들면 전혀 다른 느낌의 습지가 비밀의 정원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산책로는 호수를 한 바퀴 두르지 못하고, 마을 앞 농로를 겸하는 시멘트 포장도로 일부 구간이 전부다. 약 1km 정도여서 걷기에도 적당하다. 이마저 부담스럽다면 주남저수지 탐조대에서 무료로 대여하는 자전거를 이용해도 좋다.
수생식물이 융단처럼 빼곡히 덮은 저수지는 호수라기 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이다. 가장자리에 뒤늦은 연꽃이 몇 송이씩 피어있고, 물속에 뿌리를 감춘 버드나무가 제멋대로 군락을 이룬 원시의 늪이다. 저수지 어귀엔 어선으로 사용했을 쪽배도 수풀 아래 잠겨 자연스레 녹아 들었다. 무엇 하나 정돈되지 않은 풍경이 눈에 거슬리기보다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우거진 수풀 아래에는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물새들이 ‘구구’거리고, 나뭇가지에는 백로와 왜가리가 번갈아 앉았다 날기를 반복한다. 사진을 찍으려고 조금이라도 다가서면 딱 아쉬울 만큼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다시 앉는다. 걸핏하면 무시해온 ‘새대가리’에게 보기 좋게 놀림 당하는 꼴이다.
너무 멀리 온 건 아닌지 되돌아보는 길
이맘때 주남저수지에는 눈에 띄는 새들이 많지 않다. 왜가리와 백로가 가장 흔하고, 겨울철새지만 텃새화한 흰뺨검둥오리가 가끔씩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아열대지방에 주로 서식하는 물꿩도 있다지만 전문가도 찾기 힘들고, 운이 좋으면 이따금씩 해오라기와 물닭 가족을 볼 수 있는 정도다.
자신의 영역에서 한가롭게 먹이활동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살충제 달걀’을 떠올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절대 견딜 수 없는 비좁은 공간을 우리는 곧잘 ‘닭장’에 비유해왔다. 계란농장, 양계농장이 실질적으로는 농장이 아니라 공장이라는 사실도 짐짓 모른 체 해왔을 뿐이다. 그래서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친환경의 배신, 밀집사육의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는 공허하다. 시원한 맥주에 고소한 치킨, 끼니마다 노릇노릇 계란찜, 철마다 부드러운 영계백숙을 포기하지 못하면서 ‘동물 복지’를 논하는 것도 알량하기는 마찬가지다. 먹을 것으로 장난치는 못된 농가만 벌주기엔 모두들 너무 멀리 왔는지 모른다.
판신마을을 돌아 나와 동읍으로 연결되는 2차선 도로변에는 오리고기 전문식당이 유난히 많다. 물론 주남저수지와는 상관없는 오리다.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통구이가 눈 앞에 아른거리고 침샘을 자극했지만 참기로 했다. 짧은 가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면 어김없이 가창오리와 두루미 등 겨울 진객이 몰려들 것이다. 먹이를 찾아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온 새들에게 올해만은 ‘조류인플루엔자(AI) 주범’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길 바랄 뿐이다.
창원=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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