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역사 지우기 논란에 휩싸였다. 남부연합군 로버트 리 장군 동상 철거를 둘러싼 폭력 사태가 인종주의 갈등을 키우는 양상이다. 뉴욕 워싱턴 볼티모어 등지에선 1857년 “노예는 인간이 아닌 재물”이라고 판결했던 로저 태니 전 대법원장 동상과 리 장군 기념 명판 등이 빠르게 제거되고 있다. “노예제와 백인우월주의를 옹호했던 집단의 상징물을 존속시키는 것은 오늘날 미국 정체성과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미국민 62%는 남부의 인종주의 유산도 역사적 상징물로 남겨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 영국 로즈 장학재단은 옥스퍼드대 출신 세실 로즈가 모교에 기부한 600만파운드(현재가치 1조2,000억원)로 운영된다. 세계에서 가장 영예로운 장학금으로 꼽힌다. 로즈는 남아프리카 식민지 개척에 앞장서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 과정에서 원주민 학살, 토지 수탈 등을 자행했다. 지난해 로즈 장학금으로 유학 온 남아공 출신 학생이 캠퍼스에 있는 로즈 동상 철거운동을 벌이면서 과거사 논쟁으로 번졌다. 옥스퍼드대 총장이 “역사는 현재의 시각으로 쓸 수 있는 빈 페이지가 아니다”라며 논쟁을 정리했다.
▦ 과거 정권 역사 지우기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폐습이다. 이명박ㆍ박근혜 정부는 진보정권 10년 흔적을 지우려 혼신의 힘을 쏟았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진보 문화계 인사를 탄압하고 공영방송을 장악했다. 상해임시정부와 위안부 역사 지우기에 공들인 국정교과서를 강행했다. 새 정부에서도 보수정권 역사 지우기 조짐이 보인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9월 선보일 예정이던 우표 발행 계획이 갑자기 취소됐다. 기념음악회, 다큐멘터리 제작, 유물전시관 건립 등 다른 기념사업도 취소되거나 연기됐다.
▦ 박정희기념도서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작품이다. 박 정권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그는 관용으로 역사의 악행을 덮었다. 박정희는 숱한 시민의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지만, 지금 시대정신과 맞지 않는다고 역사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역사는 상당부분 악인에 의해 만들어진다. 사실은 신성하고 의견은 자유로운 법이다. 역사 속으로 떠나 보내 반면교사로 삼으면 될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첫 행보로 전직 대통령 묘소를 두루 참배하고 ‘역사의 화해’를 강조했다. 진영 논리에 편승한 역사 지우기의 악순환을 끊어 내야 한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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