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랜드 주의회, 합법적 절차로
“노예는 재산” 前대법관 끌어내려
남부연합군 리 장군ㆍ병사상 등
州정부들 인종주의 흔적 지우기
공영방송 여론조사 결과에선
미국인 62% “역사 파괴 반대”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남부연합의 명장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 철거에 반대한 폭력 시위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된 후 미 전역은 ‘역사 지우기’ 폭풍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짧은 역사로 인해 남북전쟁의 상처마저 보존하자던 미국인들의 민심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증폭된 인종ㆍ계층간 갈등에 부딪히면서 인종주의의 상징이 되어 버린 남부연합 영웅들의 자취가 하나둘 뽑혀나가고 있는 것이다. 백인우월주의에 반대하는 여론은 동상에 이어 남부연합기 모양을 연상시키는 것이라면 무조건 ‘근절’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트럼프 대통령을 위시한 극우주의자들은 “무참히 역사를 지우는 행위”라며 반발하고 있다.
남부연합 기념물들에 대한 척결 작업은 빠르게 진행 중이다. 메릴랜드주 주의회 운영위원회는 17일(현지시간) 애너폴리스 주의회의사당 앞에 있는 로저 태니 전 연방대법관의 145년 된 동상을 철거하기로 결정하자마자 18일 새벽 철거 노동자들이 작업을 개시했다. 태니 전 대법관은 1857년 “노예는 재산에 불과하다” “흑인은 미국 시민으로 간주되기 어렵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린 인물로, 그의 판결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당선과 노예해방선언을 촉발시킨 계기가 됐다.
앞서 17일 새벽 볼티모어에서도 태니 전 대법관 동상과 다른 남부 기념물 3개가 캐서린 퓨 시장의 지시로 철거됐고, 같은 날 뉴욕 브루클린에서도 리 장군을 기념하는 명판이 치워졌다.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에서는 지방법원 앞마당에 서 있는 남부군 병사상이 반파시스트 시위대의 난입으로 파괴됐다. 18일에는 샬러츠빌 시장이 테리 매컬리프 버지니아 주지사에게 리 장군 동상을 합법적으로 철거할 수 있는 절차를 위한 주의회 긴급회의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뉴욕에선 당국이 적극적으로 남부연합의 흔적 지우기에 착수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뉴욕메트로폴리탄교통공사는 타임스스퀘어역에서 40번가로 이어지는 지하철 통로 벽의 ‘남부연합기’를 연상시키는 타일을 모두 교체할 계획이다.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는 리 장군 등의 이름을 딴 브루클린 군사기지내 거리 이름도 바꿔달라고 군 당국에 요청했을 정도다. 이밖에도 워싱턴 국회의사당을 포함해 곳곳에서 남부 기념물에 대한 철거 제안이 쏟아지고 있다.
남부 기념물 철거 논란은 처음이 아니다. 2015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서 발생한 백인우월주의자의 흑인 교회 총기난사 사건으로 촉발된 바 있다. 당시 범인 딜런 루프가 남부연합기를 자신의 범행 상징물로 이용한 것이 알려지자 남부 기념물을 철거해야 한다는 운동이 불붙었다. “노예제와 백인우월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싸운 집단의 상징물을 존속시키는 것은 오늘날 미국의 정체성과 어긋난다”는 이유다.
그러나 ‘역사의 흔적’을 무작정 파괴해선 안 된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트럼프 대통령은 17일 트위터를 통해 “아름다운 동상과 기념물이 제거되면서 위대한 미국의 역사와 문화 일부가 사라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남부 기념물 철거 반대는 트럼프만의 의견이 아니다. 폴 르페이지 메인주 주지사는 “남부 기념물을 없애는 건 9ㆍ11 테러 기념물을 없애는 것과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미국 공영 NPRㆍPBS방송 공동여론조사에 응답한 미국인 62%는 남부 지도자 동상을 ‘역사적 상징물’로 남기는 것을 지지했다.
인종주의를 둘러싼 갈등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19일(현지시간) 미 보스턴에서 진행된 인종차별 규탄 집회에는 1만5,000여명이 집결해 반 나치와 반 파시즘을 부르짖었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들 시위대에 대해 트위터에서 “보스턴에 수많은 반 경찰 선동자들이 모인 것 같다”라며 은근히 비하했다. 이날 예술 분야의 권위상인 케네디상 수상자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차별 입장에 반발해 백악관 축하행사 참석을 거부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리셉션과 시상식 참여 불참을 결정했다. 미국 대통령 부부가 케네디상 리셉션 불참을 밝힌 것은 40년 만에 처음이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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