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노숙하는 부당해고 상경투쟁 비정규직 등에 머물 곳 제공
1000여명 자원봉사자들 리모델링, 아직 3억원은 대출 갚아야
집이 세워졌다. 한국 사회에서 처음이고, 외국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집이다. 그곳의 주인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부당해고를 당해 회사와 다투고 있거나,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적은 월급을 받는 이들이 지치고 주저앉고 싶을 때 문을 두드리면 된다. 노동권을 침해 받은 사람들은 그곳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상담을 청할 수도 있다. 서울에 거처가 없다면 비용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쉬다가 잠을 청해도 좋다. 그 잠이 달콤하길 바라기에 집의 이름은 ‘꿀잠’이다.
19일 오후 서울 신길동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이 공식 문을 열었다. 지난 4월 24일 첫삽을 뜬지 4개월 만에 완공됐다(본보 4월 25일자 15면). 기존 다세대주택 건물을 일정부분 철거하고 리모델링을 거쳐 이날에 이르기까지 모두 1,0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벽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발랐다.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과 건축가, 예술가, 시민단체 활동가, 대학생을 포함한 일반 시민들이 그 주역들이다.
이날 개관식은 재능기부자들은 물론 이웃주민들까지 200명이 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조현철 사단법인 꿀잠 이사장은 “우직한 사람들의 사랑과 연대 덕분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믿는다”며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이 올 때까지 꿀잠은 ‘여름방학 외갓집’처럼 포근한 쉼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집을 설계한 건축가 정기황씨는 “이처럼 주인이 많은 특이한 집을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그 주인들이 서툰 손으로 직접 집을 지었기 때문에 공사 기간이 평소보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짓고 나니 보람되고 뿌듯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4층 건물인 꿀잠의 1층에는 카페 겸 공용 식당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라면 누구나 무료로 양질의 식사를 할 수 있다. 차 한잔 나누며 다른 노동자들과 연대할 수 있길 기대하며 만들어진 열린 공간이다. 거리 농성을 하다 더러워진 옷을 빨 수 있는 큼직한 세탁실도 마련돼 있다.
4층에는 13~20명이 동시에 숙박 가능한 침소가 있는데, 기존 가정집 건물을 고쳤기 때문에 집에서 자는 것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특징을 갖고 있다. 새하얀 벽지와 가구, 파란색 주황색 등 알록달록한 방문은 흡사 리조트나 펜션을 떠올리게 만든다. 2~3층도 조만간 순차적으로 쉼터를 조성해 수용 인원을 늘릴 계획이다. 같은 층에는 5명이 한 번에 샤워를 할 수 있는 깔끔한 세면실도 갖춰졌다. 옥상에는 현재 여성 쉼터와 정원이 조성돼 있다. 이 밖에 노동운동 관련 전시를 할 수 있는 문화공간과 상담 및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강당이 지하에 있다.
개관한 이날부터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8명이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동양시멘트 해고 노동자 윤광채(57)씨는 “어디서 몇억원이 뚝 떨어져 쉽게 만든 집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지었기 때문에 값지다”며 “딱딱한 길바닥을 떠나 사람답게 편히 잘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꿀잠의 문은 항상 열려있다. 다만 일정 기간 숙식을 원한다면 홈페이지(http://www.cool-jam.kr)나 전화(02-856-0611)를 통해 사전 예약을 해야한다. 비정규직과 해고 노동자, 비정규직 운동 활동가들은 전액 무료로 이용가능하고, 그 외에는 소정의 기금을 내는 식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법률ㆍ건강상담과 영화상영, 요가 등의 프로그램도 제공할 예정이다.
꿀잠을 짓기 위해 지난 2년 동안 각계각층에서 건립기금이 답지한 결과 7억6,000만원이 모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재정이 빠듯하다. 부지 매입과 공사를 위해 3억원 가량의 대출금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다. 꿀잠은 또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 지원 없이 순수 시민 후원으로 운영된다. 때문에 뜻을 함께하는 시민들의 십시일반이 앞으로도 절실하다. 꿀잠의 후원 계좌는 1006-701-442424(우리은행ㆍ사단법인 꿀잠)이며, 연말정산 세액공제를 위한 기부금영수증을 받을 수 있다. 홈페이지에서 정기후원(CMS 가입)도 신청 가능하다.
글ㆍ사진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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