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의 시대ㆍ생존의 시대
자오위안 지음ㆍ홍상훈 옮김
글항아리 발행ㆍ각권 664쪽, 760쪽ㆍ각권 3만2,000원, 3만6,000원
오늘날 한국 사람들의 주 목표가 ‘서양인 되기’임을 떠올려보면, 조선시대엔 그게 ‘중국인 되기’일 거라 해서 이상한 일일 이유는 없다. 시대변화에 따라 다소 낯설게 여겨진다는 점을 빼면 말이다. 실제 연행기를 남겼다는, 박지원ㆍ홍대용 같은 소위 ‘북학파’가 중국에서 만나 밤새 필담을, 귀국 뒤엔 아쉬움 가득한 편지를 주고받는 이들은 대개 중국 강남의 지식인들, 그러니까 몸은 청나라에 살고 있지만 머리 속은 명나라 유민(遺民) 의식으로 가득 찬 이들이었다.
자오위안의 ‘증오의 시대’ ‘생존의 시대’는 명ㆍ청 교체기 중국 사대부의 의식세계 변화를 정교하게 추적한 기록이다. ‘정교하게’란 괜한 말이 아니다. 명말청초의 3대 지식인으로 꼽히는 황종희(1610~1695), 왕부지(1619~1692), 고염무(1613~1673)를 뼈대 삼아 동시대 지식인들 수십, 수백 명의 문집, 서간문 등을 일일이 다 읽어 분석하고 상하좌우로 교차시켜 덧대어뒀다.
그러다 보니 ‘증오의 시대’는 664쪽, ‘생존의 시대’는 760쪽에 이른다. 뒤에 달린 주석 같은 걸 뺀 본문만 해도 각각 570쪽, 650쪽 정도 된다. 1년 반 동안 번역하면서 그 방대한 원전을 일일이 모두 다 확인한 뒤 각주를 달아두느라 죽을 고생했다는 번역자의 ‘엄살’이 괜한 게 아니겠다 싶다. 그 고생 덕에 두터운 책임에도, 읽히는 속도는 빠르다.
번역한 홍상훈 인제대 교수는 “지식인의 이중성을 날카롭게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차갑게만 볼 것은 아니다”라고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시원함을 감출 수 없다. 오직 ‘말’과 ‘글’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했던 지식인들의 허위 의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다.
주걱턱과 툭 튀어나온 눈 등 기괴한 얼굴을 가졌다고 알려진 주원장의 명나라는, 주원장을 시작으로 그 이후 황제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선비 수백 명을 일거에 죽이는 등 사대부들을 잔혹하게 학대한 왕조로 유명하다. 세부적으로 묘사하진 않지만 저자조차 떨떠름하다는 투로 “주씨 집안 피가 어디 가겠느냐”고 써둘 정도다.
명 이전 원나라 시대 사대부란 경제력이 막강한 강남에서 책을 많이 읽은 이들이었을 뿐이다. 북쪽 베이징이 지닌 정치 권력에 대한 욕구는 강렬했으나, 실현 통로는 없었다. 명나라는 바로 그 강남에서 발원한, 강남의 국가였다. 기대치가 높을 수 밖에 없었다. 강남 사대부의 정치적 욕구가 충족될 기회였다. 그러나 그 어떤 권력자라 해도 막강한 경제력을 지닌 강남에 또 다른 권력을 줄 리 없다. 명나라는 사대부의 기대에 의심, 모욕, 고문, 학대로 응답했다.
포인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대부들은 명나라에 사족을 못 쓰느냐다. 저자는 명나라와 사대부 양측 관계를 ‘학대와 자학’으로 정리한다. “명대의 정치적 포악함은 사대부들의 인내심을 길러주었을 뿐 아니라 잔혹함에 대한 감상태도를 길러줬다. 이는 극단적 도덕주의가 형성되는 것을 도왔고, 자학을 포함한 잔혹함을 도덕적 자아 완성으로 여기도록 부추겼다.” 저자는 명대 사대부들의 성격을 딱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극단적 도덕주의로 인한 “가혹함”이라 본다.
저자의 신랄함은 이어진다. “어떤 뚜렷한 정치적 학대는 사대부가 양성되는 필요조건이었고, 강제된 정치적 처지는 오히려 고된 수련을 완성시켜주는 듯 했다. 거의 종교적이라 할 만한 이러한 정신은 폭정에서 벗어나 학대를 피학자의 자학으로 변화시켜버린다.” 그 명나라를 ‘재조지은’ 어쩌고 그리워하며, ‘명나라 유민’ 의식을 지닌 강남 지식인과의 교류를 즐겼던 조선 사대부들의 의식세계는 어떠했을까. 재미있는 상상거리다.
이는 단지 예전 역사 놀음만은 아니다. ‘고난의 시대’ ‘질곡의 시대’를 헤쳐 나왔다는 자의식이 강렬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이 언저리에 머무는 경우가 많아서다. 개발독재 시대 힘들게 우리나라를 발전시켰다는 사람들, 독재에 맞서 싸웠다는 얘기를 훈장처럼 내걸고 있는 이들, 다시 한번 시대가 바뀌어 이제 ‘종북좌파’를 끝장내야 한다는 이들 모두가 “학대를 피학자의 자학”으로 바꿨다는 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애국과 구국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일념이 난무하는 곳에 대한 저자의 말은 이렇다. “어짊과 포악함 사이의 구별이 모호해져서 혹독한 학대라는 일종의 정치문화를 내화함으로써 사대부들의 정신적 품질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 혹은 정치적 선명성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모욕적인 표현으로 규정짓고, 단죄하고, 또 그걸 ‘사이다’니 ‘콜라’니 좋다고 박수치는 오늘날 풍경을 보노라면, 학대와 자학의 굴레 안에서 맴돌았던 명나라 유민 지식인들, 그리고 조선시대 선비들에게서 우리가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말과 글을 극한으로 몰아붙여 자신의 정치적ㆍ도덕적 선명성을 찬란하게 드러내는 것, 그 또한 혹독한 학대가 피학자의 자학을 되돌아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그로 인해 사회 정의가 실현되기보다 이 시대 정신적 품질에 손상을 입히는 건 아닌지, 말과 글을 다루는 이들이라면 진지하게 고민해볼 일이다.
보통 중국사라고 하면 무슨 황제가 뭐했고, 무슨 장군이 어디서 싸우고, 어느 학자가 무슨 주장을 했다는 식의 개설 입문서 혹은 교재성 통사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보다 당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살 냄새를 직접 맡아가며 그 시대를 입체적으로 이해해보자는 차원에서 글항아리 출판사가 기획한 시리즈 중 하나다. 청나라 시기를 다룬 2015년작 ‘강남은 어디인가’에 이어 나온 게 ‘증오의 시대’ ‘생존의 시대’다. 명나라 중엽, 당나라, 청나라 말기를 다룬 책도 내년까지 순차적으로 선보인다. 갈수록 흥미 위주, 단편적 지식 위주의 다이제스트판 책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기대를 걸어볼 만한, 묵직한 시리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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