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삶의 이유를 물었던 날들이 아련하다. 늘 끼고 살았던 “왜 사는가?”라고 하는 질문은 의당 삶의 목적, 즉 “무엇을 위해 사느냐?”를 묻는 것이었다. 대답은 늘 잠정적이고 또 부분적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진 못할지언정 배부른 돼지는 되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
일상에서 이유를 묻는 질문은 흔히 목적을 묻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게 어떠한 행위를 왜 했는지 묻는 것은 그의 목적과 의도를 알고프기 때문이다. 범죄자에게 왜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느냐, 어린 아이에게 왜 그런 실수를 저질렀느냐 묻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시점에서 사회적으로 다 같이 한번 진지하게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바로 발전, 내지 성장을 왜 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유를 묻는 것은 목적을 묻는 것임과 동시에 방향을 묻는 것이다. 그리고 방향의 설정은 수단과 방법의 선정으로 이어진다.
자타공인 한국은 국가적인 역량을 저돌적으로 집중해서 부족한 부존자원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경제발전을 거둔 나라이다. 영토와 인구의 사이즈 등을 고려했을 때, 세계적으로 최저개발국의 지위에서 선진국의 지위에 오른 나라, 특히 개발원조를 받던 나라가 원조를 주는 나라로 변신한 곳은 사실상 한국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스스로를 ‘헬조선’으로 묘사하며 비판하는 사회통합의 위기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모든 개발도상국들에게 한국은 사회발전의 측면에서도 분명 부러움의 대상임에 틀림없다. 87년 이후 30년 동안의 민주화 이행과 공고화의 정점에 당당히 자리한 지난 겨울의 촛불혁명,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한 한국 시민사회의 저력도 60-70년대의 경제성장의 고공행진과 1990-2000년대의 첨단산업화 못지 않게 전 세계가 부러워할 사회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경제발전이든 사회발전이든 우리의 험난했던 근현대사 속에서 발전은 즉자적이자 무조건반사적으로 지향해야 했던 일종의 절대명제, 정언명령과 같았다. 국민공동체의 생존과 사회의 지속 자체가 파괴되고 위협에 처했던 시간들 속에서, 어떻게 하면 발전할 수 있는가, 즉 발전의 원인론을 묻고 배워서 실천하려고는 할 수 있었어도, 왜 우리는 발전해야 하는가를 굳이 자문할 겨를도 필요도 없었다. 발전을 하지 않았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는 수 십년 간 국권이 짓밟히는 수모, 외세의 개입에 의한 분단과 그에 뒤따른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겪으면서 너무나 명확하게 몸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한국사회는 경제발전 30년, 사회발전 30년의 시간을 보내고 이제 새로운 30년에 접어 들었다. 한 세대가 30년이라고 한다면, 제1, 제2세대를 보내고 난 뒤 제3세대가 새로운 발전론을 꿈꾸며 만들어야 할 때이다. 그 화두를 고민하며 떠올리게 되는 단어가 있다. 바로 공존(co-exist)이다.
세계적으로 기승하는 테러,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 4차산업혁명 속에서 인간역량의 대체, 사회적 양극화와 격차의 구조화, 그 모두 우리의 공존을 위협하는 엄청난 요인들이다. 디지털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간들이 더욱 진하게 연결되는 것도 공존을 파괴할 수 있는 새로운 위험요소들을 가득 품고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앞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어쩌면 더욱 더 적극적으로 공존하는 법을 찾고 실현하는 것에 다름 아닐 수 있다.
당장 핵미사일실험, 사드배치, 무역보복, 선제타격론, 전쟁위협으로 들끓고 있는 요사이 한반도를 둘러싼 분위기는 공존의 질서를 만들려는 노력이 얼마나 절실하고 중요한지 새삼 일깨워 준다. 공존에의 절박함이 특히나 큰 만큼 한반도야말로 미래 인간공동체 발전이론을 선도할 사고와 실천이 나올 수 있는 잠재력이 크다. 공존을 깨는 발전은 무의미하며, 공존이야말로 발전의 목적이자 이유이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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