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출범 첫해인 2013년 한국일보 법조 출입기자들은 1년을 준비해온 책을 출간하기 위해 막바지 작업에 몰두했다. 역사를 기록한다는 심정으로 이명박 정부 시절 자행된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을 정리했다. 추천사를 받는 일이 남았는데, 당시 문재인 의원 측에도 추천사를 부탁했다. 개인적으로 인연이 없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써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인상적인 문구를 남겼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진실을 비추는 불빛들이 있다. 검찰의 윤석열 같은 분이 있어 우리는 세상이 암울하지 않다는 위로를 받는다”고 적었다. 국가정보원 댓글사건을 언급하면서 ‘국가권력이 사적인 목적에 유용되면 국민을 해치는 흉기’로 규정했던 추천사를 음미해보면, 문 대통령은 댓글사건을 수사하다가 좌천된 그를 오래 전부터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염두에 둔 것 같다. 문 대통령 마음 속에 부당한 지시를 따르지 않았던 인물로 각인된 영향이 컸으리라.
부당한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르면 조직 차원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불행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2009년 6월 이명박(MB) 대통령의 친위조직을 자임했던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에 특명이 떨어졌다. MB를 향한 맹목적 충성심으로 가득했던 이영호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은 민주당 백원우 의원을 뒷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노무현 정권의 대못 뽑기를 주된 업무로 내세웠던 이 비선조직은 노 전 대통령 주변 인물에 대한 사찰도 실시하고 있었다.
6월 17일 이영호는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VIP께 고함을 지른 백원우를 비롯해 이에 동조한 사람들의 리스트를 가져오라’고 부하직원인 진경락에게 지시했다. 진경락은 백원우와 그 친인척, 보좌진 등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계획을 수립했다. 7월 17일 이영호는 진경락에게 다시 백원우의 인적 사항과 돈줄까지 알아보라고 추가로 지시했다. 독촉이 심해지자 진경락은 어쩔 수 없이 백원우의 인적 사항과 학력, 경력, 주요 활동내용, 후원회 등과 관련한 내용을 3페이지 정도로 정리해 보고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당시 민간인과 정적(政敵)에 대한 불법사찰도 서슴지 않던 무소불위의 조직이었던 탓에 위계질서가 엄격했다. 진경락은 상사인 이영호의 지시가 공직기강 감찰이라는 본래 업무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충실히 이행하는 쪽을 택했다. 진경락은 훗날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며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했지만 형사처벌을 피하지는 못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지원배제 명단) 사건으로 재판을 받던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 고위인사들도 비슷한 변명을 했다. 이들은 법정에서 “정무직 공무원으로서 위에서 시키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며 선처를 호소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지시가 위법 부당하다는 게 명백하면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 해도 책임을 져야 한다”게 재판부 판단이었다.
부당한 지시를 거부해야 하는 이유는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징계나 처벌을 피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심적 괴로움을 줄이려고 점점 자발적으로 조직에 충성을 하게 되고, 이는 잘못된 행동을 합리화하는 명분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호남 인맥의 영향력을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공직기강 업무와는 무관한 보고서를 만든 적이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8일 후인 2009년 5월 31일 작성된 보고서를 보면, 이들이 얼마나 멋대로 역사를 재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은 호남과 좌파 본류의 충실한 어릿광대 역할. 서쪽(호남)에서 모든 파이프라인을 연결해서 수십 조원 싹쓸이하고도 교묘히 숨어 있는데, 빙산의 일각을 받고도 성질 급한 경상도 기질을 이기지 못해 자살. 전 정부 말기에는 각료들이 돈 긁어 모으기에 혈안. 포스코 KT 등 대부분 주요 기업의 돈 흐름 종착역은 서쪽(민주당)이라는 것이 중론.’
부당한 지시를 하지 마라. 문재인 대통령이 4년 전 추천사를 통해 전한 메시지를 임기 내내 실천하기를 기대해 본다.
강철원 사회부 기자 stron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