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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야구에 빠지다] “엑소 오빠들과 작별하고 야구에 인생 걸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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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야구에 빠지다] “엑소 오빠들과 작별하고 야구에 인생 걸었죠”

입력
2017.08.1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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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홍중 3학년 이지아(15)양은 2주 전 경북 경주에서 열린 ‘U-15 전국 유소년 야구대회’에 출전했다. 경기 화성 리틀야구단 소속인 이양이 주니어야구팀 선수로 대회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주말에는 강원 속초에서 열리는 ‘속초시장기 전국 리틀야구 대회’에 출전했다. 여자 선수는 중학교 3학년 1학기까지는 리틀야구에서 뛰고, 2학기부터 주니어 선수가 된다. 남자 선수는 12세 이하까지만 리틀야구단 소속이고, 중학교에 올라가면 주니어팀에 속하기 때문에 리틀야구단에서는 동생들과 함께 뛰었다. 푹푹 찌는 더위에 성인 남성들도 시합을 뛰는 게 쉽지 않은데도 이양은 2주 연속 전국 대회를 뛰겠다며 손수 짐을 쌌다. 이양에게는 동갑내기든 한참 어린 동생들이든 누구랑 시합을 하는지 중요하지 않다. 한 경기라도 더 뛰어서 실력을 키우는 게 중요할 뿐이다. 야구에 인생을 걸어보겠다는 소녀는 절실함으로 똘똘 뭉쳐 있다.

이양은 지난해 초 야구 배트를 처음 들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이양은 야구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야구 좋아하는 친구들을 보면 저게 뭐가 재미있을까 싶었죠.” 그러다 프로야구 두산베어스 광팬인 외삼촌이 틀어놓은 야구 중계를 어깨 너머로 보다 은근슬쩍 야구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프로야구 경기와 함께 ‘메이저’ ‘크게 휘두르며’ ‘다이아몬드 에이스’ 등 야구를 주제로 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메이저’의 주인공이 결승전에서 팔 부상을 무릅쓰고 팀을 위해 공을 던지는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어요. 물론 잘 생겨서 더 좋았고요. 저도 던지고 싶어졌어요.”

엑소 오빠들과 결별하다

야구를 해보겠다 다짐한 이양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던 아이돌 그룹 엑소 오빠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교실에 가면 잘 생긴 프로야구 선수들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아이돌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딱 나뉘어져 있어요. 물론 야구 팬이 수는 적지만 늘고 있는 것은 분명하죠. 저도 엑소 공연을 꽤나 열심히 쫓아 다녔는데 오빠들 좋아하는 마음을 접었어요. 그 동안 공들여 모았던 오빠들 굿즈(상품)도 친구들에게 넘겨줬죠.”

엄마를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대학 때까지 배드민턴 선수로 뛰었던 이양의 어머니 김선예(48)씨는 야구를 하겠다는 외동딸을 말렸다. “어렸을 때부터 농구나 복싱 같은 운동을 곧잘 하긴 했지만 야구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던 아이가 야구를 하겠다니 깜짝 놀랐어요. 운동 선수 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알고 있으니 당연히 반대했죠.”

하지만 야구에 대한 이양의 의지는 꺾이기는커녕 더 강해졌다. 결국 김씨는 조건을 걸었다. 학교 시험 성적이 평균 90점 이상을 유지할 것. “다른 종목도 아니고, 변변한 팀도 없는 여자 야구는 선수로서 전망이 불투명하잖아요. 야구를 계속 못 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려면 공부도 소홀하지 않았으면 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이양은 화성여자야구단을 찾았다. 여자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야구를 배우고 시합을 할 수 있는 팀이 따로 없어 엄마가 성인 여성팀을 알아본 것이었다. 이 곳에서 처음 이양을 가르친 김덕수 화성여자야구단 총감독은 그의 열정에 감동했다.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엄마가 제시한 조건을 채워야 야구를 계속할 수 있다면서 야구뿐만 아니라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야구하고 나서 전보다 성적이 더 올랐습니다.”

이지아양이 화성리틀야구단에서 함께 야구하는 남학생들 앞에서 배팅 자세를 취하며 웃고 있다. 화성=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이지아양이 화성리틀야구단에서 함께 야구하는 남학생들 앞에서 배팅 자세를 취하며 웃고 있다. 화성=고영권기자youngkoh@hankookilbo.com

이양은 지난해 3월 성인 여성팀 경기에서 경험한 첫 타석의 떨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감독님이 갑자기 타석에 서게 해주셨어요. 배터 박스(타자가 공을 치기 위해 서 있는 곳)에 들어섰는데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거예요. 배트를 들고 있는데 눈 깜빡 할 사이도 없이 공이 휙휙 지나가더라고요. 결과는 볼넷이었어요. 감독님이랑 선수 언니들이 엄청 축하해 주셨죠.”

이양은 야구는 하면 할수록 매력적인 운동이라고 했다. “그냥 공을 던지고 배트로 치는 것 같지만 투수와 타자의 심리 싸움을 알아 가는 게 정말 재미 있어요. 같은 상황이라도 수 십 가지의 작전이 가능하잖아요. 그런 걸 하나하나 알아가고 제가 거기에 맞춰 던지고 친다는 것이 짜릿하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팀을 위해 나를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정신이고요.”

심리 싸움의 짜릿함과 희생의 매력

고양시에서 운영하는 다문화가정 어린이 야구팀인 고양허구연무지개리틀야구단에는 초등학교 4학년 쌍둥이인 왕지화ㆍ왕지린(10) 자매가 있다. 언니 지화는 외야수, 동생 지린은 포수다. 쌍둥이는 지난달 말 강원 횡성베이스볼파크에서 열린 ‘제4회 허구연과함께하는롯데리아페스티볼’ 대회에 출전했다. 티볼은 야구를 조금 변형시켜 티 위에 올려진 공을 때리는 경기. 지난해 여름에 이어 두 번째 전국 대회 참가인데 경기 결과는 좋지 않았다. “두 번 시합해서 두 번 다 졌어요. 상대팀 언니, 오빠들 실력이 엄청났어요. 시작도 하기 전부터 어렵겠구나 했죠.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경기에 져도 쌍둥이는 상관없다. 야구가 재미있으니까. “둘이서 틈만 나면 글러브 끼고 야구공 던지기를 해요. 날씨 좋으면 집 근처 공원이나 운동장에 나가서 연습을 하고, 날씨가 안 좋으면 집 안에서도 해요. 대회 전에는 코치님이 주신 티볼 공을 가지고 한참 던지기를 했어요.”

사실 쌍둥이 아버지인 중국인 왕준(39)씨는 딸들이 축구를 했으면 했다. 어머니 전미선(37)씨는 신기할 따름이라고 했다. “둘이 스페인에서 태어났어요. 축구의 나라에서 태어난 데다 애들 아빠나 저나 축구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그런 영향인지 둘 다 아기 때부터 바깥에서 뛰어 노는 것도 좋아하고 축구공을 좀 찼죠. 그런데 일곱 살 때 한국에 오고 나서 야구를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아빠가 살짝 서운해 할 정도로요.”

왕지린, 왕지화양이 지난달 고양허구연무지개리틀야구단 연습날 함께 마운드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왕지린, 왕지화양이 지난달 고양허구연무지개리틀야구단 연습날 함께 마운드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왜 야구가 좋을까. “제가 던진 공이 하늘 높이 올라갈 때 그걸 쳐다보는 기분이 너무 좋아요. 제가 농구도 하는데 농구공은 너무 크고 무거워서 높이 던진다고 던져도 올라가다 떨어지잖아요. 요만한 야구공은 훨훨 날아가요.”(지린). “처음에는 그냥 공 던지고 치는 것인 줄 알았지만 야구를 하면 할수록 되게 어려워요. 그렇지만 연습하면서 기술을 배우고 실력이 조금씩 느는 게 너무 재미 있어요.”(지화)

10세 왕지화ㆍ왕지린 쌍둥이 자매

운동 함께 하며 사이 더 좋아져

어머니 “야구가 애들 성장시켜”

둘은 학교에서도 같은 반이고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데 야구를 하면서 더 사이가 좋아졌다. 동생의 야구화가 작아지자 언니가 자기 신발을 선뜻 넘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야구장에 서면 경쟁심이 불탄다. 지화는 던지기에 약한 반면 잘 치고, 지린이는 배팅은 좀 부족하지만 던지고 잡는 실력이 낫다. 고양허구연무지개리틀야구단 김태민 코치는 “둘 다 배우는 자세가 아주 진지해요. 실력도 부쩍부쩍 늘고 있고요”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머니 전씨는 야구가 둘을 성장시키고 있다고 했다. “야구단에서 오빠들과 어울려 연습하면서 팀 플레이가 무엇인지도 알고 팀원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도 익히면서 성숙해가는 모습이 보인다”라고 말했다. 어느덧 ‘남자들이 하는 스포츠’라는 고정 관념은 사라지고 소녀들도 야구의 재미와 매력을 만끽하며 자기 성장의 경험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체력의 한계는 독기로 이겨 낸다

야구의 매력에 푹 빠진 소녀들은 보는 즐거움으로 만족할 수 없다. 공을 한껏 날려버리고 달리는 그 희열을 즐긴다. 그 중엔 인생을 걸겠다는 이들도 나온다. 이양의 꿈은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다. 최연소 국가대표 선수로 뽑힌 ‘천재 야구소녀’ 김라경(17) 선수가 롤 모델이다. 전국 대회에서 김 선수가 뛰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빨리 실력을 키우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야구를 목숨처럼 사랑하는 소녀들의 열정을 품어주기엔 국내 여성 야구 인프라는 너무 취약하다. 한국여자야구연맹에 등록돼 있는 중3~고3 주니어야구 선수 중 여자 선수는 단 11명. 리틀야구 선수는 통계가 아예 없다. 당연히 여학생들으로만 구성된 리틀야구팀이나 주니어팀은 없다. 소년들이 뛸 수 있는 리틀야구팀(164개)과 주니어야구팀(34개)이 전국에 198개(한국리틀야구연맹 등록기준)에 달할 정도로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결국 소녀 선수들은 남자 선수들이 대다수인 팀에서 함께 훈련을 받고 시합에 참가한다. 이양이 처음 성인 여자 야구팀을 찾아 야구를 시작하고, 지난해 여름부터는 화성리틀야구단에 합류해 평일에는 리틀야구팀에서 남학생들과, 주말에는 성인야구팀에서 언니들과 훈련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주니어 선수 여자 11명뿐

남자팀서 훈련받고 시합 참가

국내 인프라 아직 걸음마 수준

그나마 리틀팀에서는 남녀 학생들이 함께 훈련과 시합을 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주니어팀에선 남녀별 체격과 체력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여자 선수들이 남자 선수들과 나란히 야구를 하기가 어려워진다. 지금도 리틀/주니어 야구를 구분하는 나이 기준이 남자는 12세 이하/초과, 여자는 중3 1학기/2학기로 성별에 따라 다르지만 그래도 주니어팀으로 가면 아무래도 여자 선수에게 기회가 자주 돌아오지 않는다. 이양은 “야구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돼 기본기도 부족하지만 남학생들보다 힘이 모자라는 게 확실히 느껴져요. 남동생들보다 공 던질 때나 칠 때 거리가 덜 나오거든요. 어린 동생들이 주전 선수로 뛰고 저는 후보로 벤치에 앉아 있을 때는 은근히 속상하죠”라고 털어놓는다.

그래도 이양은 낙심하지 않는다. 방학을 맞아 검게 그을린 얼굴로 하루 종일 야구만 하고 있다. 아침에 연습하러 가서 오후 9시가 넘어서 집에 돌아온다. 그것도 모자라 방에서 테니스 공을 가지고 던지는 연습을 쉬지 않는다. 어머니에게 공을 던져달라 하기도 한다. 어머니 김씨는 “지독하게 해요. 저도 운동을 했지만 저런 독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저리 좋아하니 야구 그만 한다고 할 때까지 열심히 도울 수밖에 없죠”라고 말했다. 이일남 경기화성리틀야구단 감독은 “자질이 좋아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 여자 국가대표 선수를 바라 볼 수도 있을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양은 조만간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야구 견학을 갈 계획이다. “엄마가 일본으로 여행을 가자고 하셔서 제가 야구 여행을 가자고 했어요. 여자 야구팀이 많지 않은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여자 리그가 별도로 있을 정도거든요. 저도 열심히 해서 일본 리그에서 뛰고 싶어요.”

화성ㆍ고양=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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