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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2돌] 오희옥 지사 “3대에 걸쳐 목숨 건 독립운동, 내 고된 삶에 90점 주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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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2돌] 오희옥 지사 “3대에 걸쳐 목숨 건 독립운동, 내 고된 삶에 90점 주고파”

입력
2017.08.1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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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어린 나이에 공작대 입대

독립군 간 밀서 전달하는 일 맡아

의병장 할아버지ㆍ광복군 아버지

독립군 뒷바라지 도맡던 어머니…

90년에서야 뒤늦게 유공자로 인정

정부가 유공자 발굴 적극 나서야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태어난 오희옥 지사가 지난달 31일 경기 수원시 보훈복지타운 내 자택에서 고단했던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독립운동가 가문에서 태어난 오희옥 지사가 지난달 31일 경기 수원시 보훈복지타운 내 자택에서 고단했던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같이 학교 다니는 중국인들이 우리 자매를 ‘고구려 노예’라고 놀렸어요. 어린 나이에 그 소리가 어찌나 듣기 싫던지.”

이제 세 명밖에 남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 오희옥(91) 지사. 그는 지난달 31일 경기 수원시 보훈복지타운 내 자택을 찾은 본보 기자가 ‘14세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시작한’ 이유를 묻자 소박하기 그지없는 답을 내놨다. 중국 만주에서 나고 자라면서 겪은 나라 잃은 설움이 그런 아이들 놀림 속에 있었다는 것, 지나고 보니 더욱 그랬던 것 같다는 얘기.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건 분명 있었죠. 그래도 워낙 어릴 때라 ‘나라를 구한다’는 게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어요.“

오희옥 지사가 독립운동 하던 당시 사진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오희옥 지사가 독립운동 하던 당시 사진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오 지사 가문은 3대(代)에 걸쳐 독립운동을 했다. 망국의 통한에 아들을 데리고 중국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한 오인수(1867~1935) 의병장은 할아버지, 뒤 이어 대한독립군단 중대장과 광복군 장군으로 활약한 오광선(1896~1967) 장군은 아버지다. 어머니 정현숙(1900~1992) 지사도 독립군 뒷바라지와 비밀연락 임무를 수행하며 ‘만주의 어머니’라 불렸고, 두 살 터울 언니 오희영(1924~1970) 지사도 남편과 부부독립군으로 활동했다. 오 지사에게 독립운동은 삶 그 자체였고, 가족사였다. 그러니 “독립운동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웠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게 당연해 보였다. 분했던 아이들 놀림을 독립운동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꼽는지도 수긍이 갈 수밖에 없었다.

1939년 중국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면서 독립운동이라는 험난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본군 정보 수집, 초모공작(공작원 모집활동)을 하고 일본인 눈을 피해 독립군 간 밀서를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독립군 아저씨가 ‘밀서를 어디에 가져다 줘’라고 하면 혼자 그걸 들고 전달하러 가는 거에요. 무섭기도 무서웠죠.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나라가 위험한데 뭐라도 하려고 한 거죠. 그땐 얼마나 위험한지, 얼마나 무서운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물론 시련과 고난이 없을 수는 없었다. 다만 오 지사는 말을 아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냥 힘들었다”는 얘기만 반복했다. 아버지가 일본 헌병대에 잡혀간 뒤에 극심한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는 것 정도가 그가 구체적으로 전해준 고난의 한 토막이었다.

오 지사는 소속돼 있던 공작대가 광복군 제5지대에 편입(1941년)된 이후 충칭(重慶)에서 광복을 맞았다. 벌써 72년 전 일이지만 해방 소식을 들었던 순간은 여전히 또렷하기만 하다. “학교에 있었는데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했다’ ‘우리나라가 해방됐다’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 길로 하던 거 다 팽개친 채 집으로 달려갔죠. 늘 그려왔던 날이라 그런가, 우리나라를 되찾았다는 사실이 신기하리만치 바로 실감이 나더라고요.”

어떤 영광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섭섭한 점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다. 광복 이후 중국에서 서울로 건너온 오 지사는 90년이 돼서야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됐다. “청렴하셨던 아버지가 ‘우리 식구가 다 유공자로 인정 받으면 남들이 욕한다’고 어머니와 저는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지만, “정부가 독립유공자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줬어야 했다”는 게 오 지사 생각이다. “그나마 저는 나은 편이에요. 저희 어머니는 돌아가신 후에야 공로를 인정받았어요. 살아계실 때 입버릇처럼 ‘나는 표창 한번 못 받아보고 죽냐’고 하셨는데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죠.”

여성으로서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다. 여성독립운동가는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 받지 못한 데다, 남성을 돕는 역할 정도로 인식되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 “일제 만행을 알리려고 손가락을 잘라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국제연맹조사단에 전달했던 남자현 지사처럼 훌륭한 여성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저희 어머니만 해도 일본 경찰에 끌려가는 독립운동가를 치마폭으로 감싸 안아 보호했을 정도로 용맹스러워 ‘여장군’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는데, 돌아가신 후에야 겨우 인정을 받았으니까요.”

‘우리의 삶을 인정해달라’고 하면 ‘돈 때문에 저런다’는 차가운 시선이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오 지사는 “우리 생이 고단하기도 했거니와 가치 있었다는 것을 확인 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강조했다. “고생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누군가 했어야 했던 일이니까 ‘목숨이 붙어만 있어도 다행이다’ ‘밥을 거르지 않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견뎌낸 거죠.” 두 시간 가량 이어진 인터뷰 말미 오 지사에게 ‘아흔이 넘은 지금, 본인 삶에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 정도를 줄 수 있겠냐’는 세속적인 물음을 던졌다. 몇 초간 침묵 뒤 그의 입이 열렸다. “그래도 90점은 주고 싶어요.” 처음으로 그의 눈에서 눈물이 보였다.

수원=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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