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전’ ‘진흙탕 싸움’ 프레임
동반사퇴?… 진실 규명이 먼저
영화 ‘내부자들’의 안상구는 썩은 내 나는 정경유착의 결정적 증거를 폭로합니다. 유력 대선주자와 재벌 회장간 핵폭탄급 비자금 스캔들입니다. 하지만 안상구의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깡그리 무시됩니다. 유력 일간지 조국 논설주간이 옭아맨 ‘프레임(틀 짓기ㆍframing)’의 덫에 안상구가 걸려든 것입니다. “쓰레기, 안상구가 한 말을 여러분은 믿습니까!”
한가하게 갑자기 웬 영화 이야기냐구요? 요즘 이철성 경찰청장의 ‘광주 민주화의 성지’ 글 삭제 외압과 촛불 비하 발언 진위 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공방을 보며 문뜩 생각이 났습니다.
촛불과 호남을 비꼬는듯한 경찰총수의 막말 의혹 보도를 인정한 강인철 중앙경찰학교장에 맞서 그의 치부를 흘리는 모양새의 경찰청, 자신의 주장은 진실이라며 수위를 높이는 강 학교장…. 말 그대로 치열한 프레임 전쟁입니다.
[관련기사] ☞ ‘민주화의 성지’ 썼다고 이철성 격노
[관련기사] ☞ 강인철 전 광주청장 신상털기식 감찰
[관련기사] ☞ “이철성 경찰청장이 외압” 잇단 증언
언론 역시 최초 의혹을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진흙탕’, ‘폭로전’, ‘항명’, ‘갑질’ 등등의 프레임으로 두 사람을 싸잡아 공격하며 동반 사퇴를 압박하거나, 허위에 가까운 자극적인 기사들로 인신공격에 열을 올립니다.
사실 첫 기사가 나간 경위를 돌이켜보면, 이런 틀 짓기가 적절한지 의문입니다. 이 청장 발언 의혹과 관련한 제보는 강 학교장이 아니라 다른 경찰 간부들로부터 술자리에서 우연히 들었습니다. 지난달 말 경찰 고위직 인사가 마무리 된 뒤 가진 만남이었습니다. 술 잔이 돌수록 결론은 “정권이 바뀌었는데, 이 청장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자의 촉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튀어나왔습니다. 지난해 11월 촛불집회 당시 “민주화의 성지에서 근무하니 좋느냐”는 등 이 청장이 강 학교장에게 노발대발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강 학교장이 광주경찰청장으로 있을 때, 광주청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이 이유였다고 했습니다. 진실이라면 광주민주화 운동의 정통성은 물론,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킨 촛불민심을 폄하한 대단히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자는 다음날부터 확인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강 학교장은 입을 굳게 다물었습니다. 그는 솔직히 말했습니다. “자신이 감찰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통화 내용이 나가면, 항명한다고 더 찍힐 텐데 내가 어떻게 말을 합니까.” 이해가 됐습니다. 기자의 질문공세에 이 청장의 전화를 받았다는 건 인정한 모양새가 됐지만, 그 내용만은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강 학교장이 말을 하지 않으니 다음은 당시 그가 주재한 회의에 참여했던 광주청 간부 3,4명을 상대로 취재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조심스러워했습니다. 대상이 경찰총수이니 이해가 됐습니다. 그럼에도 일부는 취재원 보호를 전제로 조금씩 입을 뗐습니다. 이 청장과 통화 뒤 강 학교장의 당혹스런 표정, 강 학교장이 서둘러 지시했다는 구체적인 발언, SNS 글을 삭제하게 된 기술적 과정 등에 대한 기억이 공통됐고 상당히 구체적이었습니다.
첫 보도는 이런 과정을 거쳐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청장은 통화사실 자체를 부인했습니다. 또 ‘백남기 농민 노제를 앞둔 상황에서 해외 휴가를 낸 것은 질책한 바 있다’며 보도와 관련 없는 해명으로 강 학교장을 깎아 내렸습니다. 이 청장이 강하게 부인하며 자신을 시국사건에 대응력이 떨어지는 한심한 간부로 낙인 찍으려 하자, 강 학교장의 태도도 바뀐 듯싶었습니다. 기자에게는 조심스러워하던 강 학교장이 되레 수위 높은 발언으로 그날의 구체적인 정황과 표현 등을 말한 것입니다.
의혹을 처음 제기한 기자로선 강 학교장의 뒤늦은 토로가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에선 강 학교장에 대한 경찰청의 대응이 염려스러웠습니다. 경찰청은 그를 수사의뢰하고 연일 감찰 내용 일부를 흘리며 깎아 내리고 있습니다. 마치 영화 내부자들의 조국 논설위원이 추구했던 프레임과도 비슷하게 말입니다. 물론 경찰청의 감찰 과정에서 드러난 강 학교장의 일부 부적절한 처신과 발언 등도 사안의 중대성과 사실 여부를 가려 엄중히 조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건, 양측의 치열한 공방 속에서 애초 제기된 의혹에 대한 규명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뇌부 이전투구가 이번 논란의 핵심이 아니라는 국민적 인식과 여론이 여전한데도 말입니다.
뒤늦게 행정안전부가 개입을 한다고 하니 지켜볼 일입니다만, 단순한 ‘공직기강 차원’에서 두 사람의 사과와 화해 정도로 진실을 덮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국민께 서둘러 진위가 무엇인지를 알려야 합니다. 방법도 간단합니다. 당시 통화기록을 조회하거나 두 사람의 휴대폰을 ‘디지털포렌식’ 하면 될 일입니다. 그래야 정권의 정통성도 굳건히 설수 있습니다. 이 정권은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국민에 의한’ 정부이기 때문이다.
유명식기자 gija@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