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로저 젤라즈니의 신화적 SF
#1
불교-힌두교 갈등의 역사 바탕
무협지ㆍ철학 같은 작품 선보여
세계의 신화와 민담 종횡무진
#2
“젤라즈니 이후 SF는 이전과 달라”
동료 작가들 ‘환상의 왕’으로 극찬
국내 만화 게임 연극에도 영향
1979년 11월 4일, 이란의 이슬람혁명 당시 미 대사관 직원들이 시위대에 의해 인질로 잡히는 사건이 있었다. 그 중 여섯 명이 탈출해 캐나다 대사관으로 숨어들어갔고, 이들을 빼내기 위한 캐나다 정부와 미 중앙정보국(CIA)의 극비 공조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CIA의 탈출 전문가 토니 멘데스는 SF영화 촬영지 탐방을 핑계로 이란에 잠입한다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생각해냈다.
하려면 확실하게 할 마음을 먹은 이들은 본격적으로 일을 꾸몄다. ‘스타트렉’과 ‘혹성탈출’등에 관여한 특수 분장계의 전설 존 쳄버스가 작전에 참여했고 스탠 리와 함께 ‘판타스틱 포’, ‘엑스맨’과 ‘헐크’를 만든 만화계의 전설 잭 커비가 콘티를 그렸다. 작전팀은 실제로 사무실을 차리고 판권을 사고 헐리우드에서 제작 발표회까지 했다. 이 유례없는 작전 ‘캐나디안 케이퍼’는 벤 에플렉 주연의 영화 ‘아르고’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여섯 명은 잘 탈출했지만 정작 SF 팬들은 영화가 엎어진 것에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으니, 바로 이 가짜영화 ‘아르고’의 원작이 작가 로저 젤라즈니의 대표작 ‘신들의 사회(Lord of Light)’(1967)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아직까지도 영상화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신화와 종교를 SF의 세계로
‘신들의 사회’가 이 작전에 채택된 까닭은 이 소설이 불교와 힌두교에 기반을 둔 작품이라, 중동인 이란에서 촬영한다는 명분이 먹혔기 때문이었다. 1993년,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이 소설이 종교와 철학소설을 주로 출간하는 정신세계사에서 마치 종교서적의 하나인 듯이 출간된 것도 이 소설의 독보적인 면을 짐작하게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의 이름 ‘샘’은 마하사마트만(Mahasamatman) 즉 ‘위대한(maha) 영혼(atman)의 자’의 가운데 글자 ‘sam’에서 따온 것으로, 세존, 마이트레야, 혹은 붓다의 현신인 ‘빛의 왕’이다. 샘이 싸우는 적들은 힌두신의 이름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초과학을 가진 다른 행성의 인류로, 지금은 이 행성에 정착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악마’는 인간의 몸을 잠식할 수 있는 현지 외계인이며, 샘에게 져 감옥에 수용되었다는 설정에까지 이르면, 과학과 종교와 신화를 결합시키는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샘’의 투쟁은 일면으로는 펄프 픽션에서 볼 법한 영웅의 모험담이지만, 일면으로는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신화담이며, 일면으로는 실제 역사에 있었던 힌두교와 불교의 갈등이다.
젤라즈니의 소설은 일면 무협소설 같고, 한편 하드보일드 액션 소설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종교소설과 철학소설 같고, 일면은 셰익스피어를 연상시키는 고전 문학처럼도 보인다. 서로 어우러지리라 상상하기 어려운 이 조합은 젤라즈니의 많은 작품에서 드러나는 특징이다.
그의 첫 장편작인 ‘내 이름은 콘래드’의 주 배경은 핵전쟁 이후 외계인이 다스리고 돌연변이들이 가득한 미래의 그리스다. 하지만 이 SF적인 미래세계는 그리스 신화세계를 그대로 연상시킨다. 주인공 콘래드는 돌연변이로 영생하며 못생기고 한쪽 다리가 짧은 인물로, 별명은 ‘칼리칸자로스(반인반수의 괴물)’이며 모습은 기술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연상시킨다. 오염된 지구에는 신화적인 생물들이 돌아다니고, 황야에는 뿔과 발굽이 있는 사람들이 떠돈다. 하지만 이들이 악마는 아니다. 돌연변이일 뿐이다.
젤라즈니가 다룬 신화는 이뿐이 아니다. 그는 ‘별을 쫓는 자’에서는 미 원주민 나바호족 신화를 소재로 했고, 중국 신화(악의 왕ㆍLord Demon), 기독교 신화(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이집트 신화(빛과 어둠의 생물ㆍCreatures of Light and Darkness), 북유럽 신화(로키의 가면ㆍThe Mask of Loki)는 물론, 크툴루 신화(고독한 시월의 밤)까지 섭렵했다.
‘앰버 연대기’는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 연대기’에 비견되는, 젤라즈니의 모든 역량이 집약된 대하 장편이다. 이 소설에서 현실을 포함한 모든 세계는 ‘진짜 세계’인 ‘앰버’의 그림자다. 다중우주론과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연상시키는 이 세계관 아래서 우리의 현실을 비롯한 무수한 신화의 세계가 펼쳐진다. 타로카드의 상징과 셰익스피어 문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가운데 북유럽, 일본, 아서왕 전설이 ‘앰버’의 그림자세계 안에서 하나가 된다. 이 작품은 판타지와 SF의 구분을 말할 때 제시할 수 있는 훌륭한 예시다. 정확히 그 둘이 한 작품 안에 반반씩 담길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SF 뉴웨이브의 거장
1960년대의 작가들은 대부분 히피문화와 비틀즈 음악을 즐겼고 베트남 반전운동을 중심으로 한 청년 시위에 참여한 이들이었다. 대부분 전쟁 중에 태어났고 적당히 반체제적이었다. 그들은 전쟁 이전에 태어나 과학이 가져올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던 옛 작가들과는 성향이 달랐다.
SF뉴웨이브는 그들을 중심으로, 계속 외우주로 향하던 SF문학을 내면의 내우주로 확장하는 운동이었다. 인류학자이기도 했던 작가 제임스 건은 “모험가도 발명가도 과학자도 아닌, 보통의 사람들”이라는 말로 이 운동을 표현했다. J. G. 밸러드는 “SF는 우주에서 지구로 내려와야 한다. 당장 우리가 만날 미래는 지구에 있다”고 말했다. 밸러드는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심리에 집중했고 르 귄은 인류학을, 젤라즈니는 신화를 소재로 삼았다.
전통적인 SF작가들은 이 물결에 살짝 당황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과학소설에서 과학을 배제하면 대체 뭐가 남는가?”하며 걱정했지만 성과 자체는 인정했다. 결과적으로 SF의 영역은 크게 넓어졌다. 르 귄은 “작가와 독자의 수, 주제의 폭, 정치적, 문학적 의식 모든 면에서, 모든 방향으로 문이 열리는 듯했다”고 말했다.
SF에 주류 문학가들이 진출하고, 진보적이고 페미니즘적인 색채가 들어온 것도 이 즈음이다. 스필버그의 ‘AI’의 원작자이기도 한 브라이언 올디스는 그간 여성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가치 절하되었던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을 SF의 기원으로 재조명했고, 이는 지금은 거의 정설로 굳어졌다. SF의 악동으로 불리는 할란 엘리슨은 그간 ‘자연과학적이지 않다’며 무시되었던 작가들을 적극 발굴했으며, 그 중에는 가난한 흑인여성이라는 이유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도 있었다.
뉴웨이브 운동은 이후 실험성이 강해지면서 기세가 꺾이고 80년대의 사이버펑크 운동으로 이어지지만, SF의 문학성과 다양성을 크게 끌어올린 계기가 되었다.
SF의 영역을 변화시킨 작가
신화를 현대세계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작가는 젤라즈니가 남긴 유산을 무시하고 가기 어렵다. 그래픽노블 ‘샌드맨’으로 DC코믹스 세계관에 문학과 신화의 색채를 가져온 작가 닐 게이먼은, 자신의 글쓰기 스타일에서부터 소재까지, 전면적으로 로저 젤라즈니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젤라즈니는 SF 전문 기획자이자 번역가인 김상훈의 노력으로 일찍부터 국내에 다수의 작품이 번역되어 국내에 유달리 팬이 많은 편이다. 덕분에 현대 한국 작가에게 종종 흔적이 발견된다. 1999년 제 1회 김상열 연극상을 수상한 조광화 희곡ㆍ연출의 연극 ‘철안 붓다’는 ‘신들의 사회’가 원작이며, 소프트맥스가 출시한 고전 게임 ‘창세기전’에서 초과학을 가진 외계인들이 다른 행성에 와서 다신교의 신이 된다는 설정에서도 이 작품의 영향을 무시하기 어렵다. 만화가 이정애가 그린 부처와 예수의 현신이 전쟁을 벌이는 ‘열왕대전기’도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고, 만화가 유시진의 ‘폐쇄자’에도 ‘앰버 연대기’의 세계가 엿보인다.
젤라즈니는 다소 젊은 나이였던 58세에 죽었다. 그가 죽자 오랜 친구였던 ‘왕좌의 게임’의 원작자 조지 R.R. 마틴은 “그의 소설을 보았을 때 전율했고, 이제 SF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며 추모했다. 닐 게이먼을 비롯한 동료 작가들은 ‘빛의 왕(신들의 사회)’의 이름을 딴 ‘환상의 왕(Lord of the Fantastic)’이라는 이름의 추모선집을 그에게 헌사했다. 2015년 5월 31일, 그가 살았던 산타페에서는 마틴 소유의 장 콕토 영화관에서 젤라즈니 사후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김보영ㆍSF 작가
로저 조지프 크리스토퍼 젤라즈니
1937년 5월 13일~1995년 6월 14일. 어릴 적 신화에 빠져 살았고 대학에서 심리학과 영문학을 공부했다. 무술에 탐닉하여 펜싱, 공수도, 유도, 태극권, 태권도, 합기도를 연마했다. 이 독특한 이력은 그의 SF소설에 신화, 고전문학, 하드보일드한 액션과 모험담을 어우러지게 했고, 결과적으로 SF계에 순문학적 심상과 하드보일드 문학, 신화적 색채를 끌어들인다. 어슐러 르 귄과 함께 SF 뉴웨이브의 두 거장 중 하나로 불리며, 이 운동의 미국측 선구자로 평가된다. 네 번의 네뷸러 상과 여섯 번의 휴고 상을 수상했다.
<소개된 책> 소개된>
신들의 사회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행복한책읽기 발행
내 이름은 콘래드
로저 젤라즈니 지음
곽영미 최지원 옮김
시공사 발행
앰버 연대기
로저 젤라즈니 지음
최용훈 옮김
사람과 책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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