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5학년 때다. 학교 소풍을 간 자리, 장기자랑 시간에 우연히 마이크를 잡았다.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였다. 장기자랑 참가자들을 이끌고 관객을 웃기고, 짧은 시간 친구들의 즐거움을 책임지면서 진행의 묘미를 어렴풋이 알게 됐다.
사회자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었고, MC가 독립적인 직업으로 여겨지지 않던 시대였다. 내 꿈도 막연했다. 그러던 1995년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KBS2 예능프로그램 ‘이문세쇼’를 보게 됐다. 따져보면 오늘날 KBS2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모태가 되는 토크쇼라 할 수 있겠다. ‘아 이거다!’ 눈이 번쩍 뜨였다. “저쪽 관객분은 신승훈씨 보면서 ‘너 얼마나 잘하나 보자, 난 김건모 팬인데’ 이런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관객을 놀리고 호응을 끌어내면서도 적기에 현장을 정리하는, MC의 기교가 참 노련했다.
당시 이문세 오빠는 1985년부터 MBC 표준FM ‘별이 빛나는 밤에’(‘별밤’)를 진행하던 별밤지기(DJ)였다. ‘영원한 별밤지기’, ‘밤의 문화 대통령’으로 고등학교 시절 내 또래 친구들에겐 아이돌 가수 뺨치는 인기를 누렸다. ‘저런 사람이 돼야겠다’ 생각하고 담임 선생님에게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물었다. “공부 열심히 하면 되고, 방송국 시험 봐서 합격하면 된다”고 했다.
선생님은 수학능력평가(수능) 준비에 전념하라는 의도였겠지만, 내 노력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별밤’을 듣는 일은 나에게 수업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레코드 가게는 배운 내용을 실습하는, 나만의 ‘별밤’이 됐다. 우울한 친구들을 위로해주고 신청곡을 들려주는 일에 나는 완전히 매료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KBS 쿨FM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 여름 캠프에 당첨됐다. 공개방송을 보러 강원 용평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우연히 장기자랑을 진행했다. 그때 버스에서 날 유심히 본 PD의 제안으로 그날 공개방송 코너의 사회를 봤다. 방송이 나간 2주 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별밤’의 고은경 작가에게 섭외 전화가 왔다. 그렇게 ‘별밤’ 여름방학 특집에 출연했고 꿈에 그리던 오빠를 만났다.
그러나 오빠는 내가 생각한 키다리 아저씨가 아니었다. 방송이 끝나고 날 부르더니 “오늘 방송 네가 잘한 것 같냐”고 물었다. “잘한 것 같다”고 했더니 비수 같은 말이 날아왔다. “너보다 잘하는 애들이 지금 뭐 하는 줄 아니? 공부하고 있어. 너는 그냥 보통 애인 거야. 가서 공부나 해라.”
방송에선 따뜻했던 오빠가 알고 보니 독설가였다.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났다. 분하고 미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묘한 독기가 올라왔다. 오빠보다 더 훌륭한 MC가 돼서 보란 듯이 다시 나타나야겠다 생각했다. 다음날 고시원에 들어갔다. 목표는 오로지 ‘이문세 타도’. 대학 수능 준비에 전념해 동덕여대 방송연예과에 합격했다.
수능을 마치고 어느 날, 이번엔 이문세 오빠가 진행하는 MBC FM4U ‘2시의 데이트’에서 연락이 왔다. 오빠를 찾아갔더니 수능 결과를 묻길래 “오빠보다 좋은 대학 갈 것 같다”고 쏘아붙였다. 오빠가 “말귀 잘 알아듣네”라며 웃더니, 다음주부터 내 코너를 따로 만들겠다고 했다. 그동안 품어왔던 앙금이 한방에 사르르 녹았다. 알고 보니 방송이 길이 아닐 경우, 차선을 택할 준비를 하라는 인생 선배의 배려였다. 그때부터 오빠와 나의 긴 인연이 이어졌다.
6개월간 ‘그는 누구인가’란 5~10분짜리 고정 코너를 진행하면서 참 많이 배웠다. MBC 사내 도서관에서 연예인들의 인터뷰 자료를 수집해 그에 관한 소개글을 만들고 작가의 검토를 받았다. ‘재미 있는 요소가 없다’, ‘중언이 많다’는 수정 요구가 떨어지면 이틀간 원고를 다듬었다. 지금도 내가 제작발표회, 시사회 현장에서 대본, 보도자료를 보고 진행을 준비할 때 멘트 정리를 잘하는 건 그때의 경험 덕분 아닌가 싶다.
1998년 KBS2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돌발소녀’로 텔레비전에 데뷔했다. 그사이 오빠는 날 데리고 다니며 여러 사람에게 소개를 했다. 매니저 역할을 직접 해줬던 거다. 내 쉰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다들 “니 목소리로 무슨 MC를 하냐”고 했다. 그럴 때마다 오빠는 짓궂은 농담으로 날 다독였다. “경림아, 괜찮아. 목소리 얼굴 몸매, 뭐 하나 잘난 게 없지만 너에겐 끼와 열정이 있잖니. 넌 할 수 있어.” 이후 내가 영화 섭외가 들어올 정도로 성장하자 오빠는 자신과 일하던 매니저를 나에게 붙여줬다. 그 매니저와는 9년을 함께 일했다.
오빠는 물심양면으로 날 도왔다. 10여 년 전엔 추천서도 써줬고, 미국 유학을 가 있을 때는 학비까지 보내줬다.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더라도 오빠가 보여준 자기 관리와 자아 성찰, 한 분야에서 노력하는 꾸준함의 미학은 끊임없이 나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조건 없는 지지와 응원으로 날 춤추고, 날게 만들었다. 진행자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면서 가수로서 자신의 역할도 놓치지 않는 프로 정신도 나에겐 귀감이 됐다.
예능 방송에서 주가를 올리던 1999년, 토크로 콘서트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수는 노래로, 개그맨은 코미디로 콘서트를 여는데 진행자가 여는 콘서트는 없을까 고민하다 보니 나온 아이디어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주부들이 느끼는 감정과 고민들을 풀 수 있는 장을 만들어보겠다 했더니, 오빠가 도와주겠다고 했다. 함께 할 수 있는 공연기획팀을 소개해줘 수월하게 공연을 열 수 있었다. 토크콘서트는 지난해 시즌3를 열었다.
더 놀라운 일은 따로 있다. 2008년 그렇게 그리고 그리던 ‘별밤지기’가 됐고, 2013년엔 ‘2시의 데이트’ 진행을 맡았다. 오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꿈꿔왔던 일들이 하나 둘씩 이뤄졌다. 내가 진행한 ‘2시의 데이트’의 첫 게스트는 당연히 오빠였다. 이후 오랜 기간 라디오 생방송을 진행하면서 대화의 주제를 끌어내고 결론을 내리고, 적재적소에 콘텐츠를 배치해 진행하는 기술이 많이 늘었다.
내 활동의 배경에는 늘 오빠가 있었다. 나는 종종 오빠를 아버지라 불렀다. 나중에 왜 그렇게까지 날 지지해줬는지 물었지만 “나도 모르겠다. 그냥 도와주고 싶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받은 게 많아서, 요즘엔 후배들을 자꾸 돌아보게 된다. 내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방송인 박슬기, 하지영이 자기 분야에서 자리잡은 모습을 보면 참 대견하다. 어느 분야에서든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으며 한 길만 파면 결국에는 결실을 맺는다는 걸 이제 막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질풍노도의 시절, 내 긴 밤을 책임지던 어느 ‘별밤지기’에게 배운 단순하지만 강력한 진리다.
<방송인 박경림의 구술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정리=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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