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흥미롭다. 뒷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이야기의 뒷이야기라면!
‘피터와 앨리스와 푸의 여행’엔 세계 명작 동화에 얽힌 이야기가 빼곡하게 들어 있다. 저자인 곽한영 부산대 사범대 교수는 캐나다 헌책방에서 ‘키다리 아저씨’ 초판본을 발견한 뒤 고전 동화 초판본 수집에 빠졌고, 동화의 사연을 부지런히 파고 들었다. 곽 교수가 ‘모르는 게 없지만 젠체 않는 다정한 삼촌처럼’ 들려주는 이야기가 책장을 덮을 때까지 꼬리를 문다. 동화 작가의 삶부터 시대 상황, 초판의 만듦새까지, 그야말로 동화의 모든 것이다.
소녀들의 로망인 ‘빨간 머리 앤’의 사연.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자전 소설이다. 엄마는 몽고메리가 두 살 때 죽었고, 아빠는 몽고메리를 버렸다. 재혼한 뒤엔 ‘하녀’로 딸을 데려가 학대했다. 고아인 앤보다 더 불행한 어린 시절. 몽고메리는 자기 이야기에 살을 보태 낭만적으로 포장하는 것으로 버틴 이야기꾼이었다. 마릴라 아주머니도, 매슈 아저씨도 실존 인물이다. ‘주근깨 빼빼 마른’ 앤과 달리 몽고메리가 도도한 예쁜 아이였다는 건 반전. 초판본 표지에 앤을 고혹적으로 우아한 여성으로 그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다닌, 허영심에 들뜬 사람이기도 했다.
앤과 달리 몽고메리의 말년은 비참했다. 표절 소송과 투자 실패 등으로 돈이 궁해지자 기계처럼 글을 썼다. 앤 시리즈의 6편쯤부터는 ‘울면서’ 썼다고도 한다. 우울증, 정신분열증 등에 시달리다 자살했다는 설이 파다하다. 유족이 몽고메리의 이름을 계속 팔기 위해 유언장을 감췄을 뿐.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앤이 소설에서 발산하는 에너지에 실감이 실린다. 앤이 버릇처럼 외친 “정말 멋진 날이에요!” 앤처럼 평온하게 살고 싶었던 몽고메리의 절박한 주문 아닐까.
곽 교수의 책은 이처럼 ‘동화적’이지 않다. 동심을 무시로 깬다. 루이스 캐럴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앨리스’)’를 쓴 사연은 충격적이다. 그저 어린 독자들을 기쁘게 해 주려는 게 아니었다. 캐럴이 엉뚱하고도 간간한 이야기로 아이의 환심을 사려 한, 독신의 소아성애자였다는 게 정설에 가깝다. 그가 아이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유족은 불태웠다. 편지 내용은 차라리 알려지지 않는 게 나을지도.
“작가와 작품을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주인공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발맞추어 걷는 느낌이다.” 저자는 말했다. 아름답게 간직한 옛사랑의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되는 씁쓸함을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깊이 읽기는 필요하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김수영 ‘풀’) 김수영도, 그가 시를 쓴 1968년을 모르고는 풀이 눕는 처연함을 죽어도 이해할 수 없듯이.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피터와 앨리스와 푸의 여행
곽한영 지음
창비 발행ㆍ336쪽ㆍ1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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