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ㆍ아편에 기댄 가난한 마을에
왕실 재산 털어 작물 개발 보급
동남아 스타트업 출현 잇따르고
인도네시아 크라우드 펀딩도 발전

글로벌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지난해 인도네시아 끼따비사닷컴(Kitabisa.com)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알파띠 띠무르를 아시아에서 주목할 만한 30세 이하 사회적 기업가 30명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포브스는 2013년 인도네시아에 처음 소셜 크라우드 펀딩(사회적 문제를 환기시키기 위해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해 대중으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방식)을 선보인 알파띠 띠무르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점에 주목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로 풀이되는 끼따비사닷컴은 한국의 상부상조(相扶相助) 전통과 유사한 ‘고똥 로용(gotong royong)’ 관습에 기반한 소셜 크라우드 펀딩 서비스다. 예를 들어 마을 관개시설 개ㆍ보수에 필요한 자금을 온라인을 통해 지역 공동체 내ㆍ외부로부터 조달한 뒤 발생한 수익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기존 오프라인 일변도였던 사회 발전 운동을 디지털 세계로 확장시켰다는 평가 속에 끼따비사닷컴은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다.
2017년 하반기 동남아시아는 이래저래 어수선하다. 무슬림 인구 2억5,000만명인 동남아를 겨냥해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 국가(IS) 세력 확장이 현실화면서 회원국 간 공조 발걸음이 바빠지고 있다. 단일 경제권 구축을 목표로 2016년 1월 1일 닻을 올린 아세안경제공동체(AECㆍASEAN Economic Community)를 진전시키기 위한 논의 역시 뜨겁다. 이밖에 동남아를 둘러싼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 틈새에서 실익을 챙기려는 줄타기도 한창이다. 굵직굵직한 정치적ㆍ외교적ㆍ경제적 이슈만큼 수면 위로 떠오르지는 않지만 눈에 띌 만한 사회적 변화 또한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역내 사회 발전 운동의 진화는 그 중에서도 첫 손가락으로 꼽힌다.
사실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를 경험한 개발도상국이 대다수인 동남아에서 사회 발전 운동은 낯설지 않다. 선진국 정부의 공적개발원조(ODA), 국제기구의 각종 원조 프로그램 및 비정부기구(NGO) 활동 등 역사는 제법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물론 외부 세력만이 동남아의 사회 발전 운동을 이끌어 온 것은 아니다. 개별 국가 차원에서도 관 주도로 주거 환경 개선, 주민 소득 증대, 공동체 인프라 구축 등을 꾀하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전개돼 왔다. 지난해 10월 서거한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야심차게 추진해 온 ‘로열 프로젝트(Royal Projects)’가 모범 사례로 거론된다.

70년간 왕위를 유지한 고 푸미폰 국왕은 일찌감치 태국 북부 지역에 거주하는 고산족들의 열악한 생활 형편 개선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이들이 자연을 파괴하는 화전 농법과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치는 아편 생산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도록 로열 프로젝트에 팔을 걷어붙였다. 왕실 재산을 털어 환금 작물을 개발ㆍ보급하고 교육ㆍ보건 환경을 개선하려는 인내심이 차츰 결실을 맺으면서 그는 1998년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실제 치앙마이에서 만난 한 고산족 주민은 “로열 프로젝트 덕분에 고급 호텔, 리조트에 유기농 채소와 과일을 납품하게 되면서 살림살이가 한결 넉넉해 졌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러한 전통 위에 최근 사회 발전 운동이 진화하는 모습이 나타나 눈길을 끈다. 우선 민간이 앞장서 자연 환경을 보호하고 공동체 가치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인도네시아가 자랑하는 세계적 휴양지 발리의 에코(생태) 관광 붐이 대표적이다. 지역 언론 등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전역 수 천여 개 호텔 중 절반 이상이 발리에 들어서면서 식수 오염 등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됐다. 개발 지상주의가 불러온 과도한 관광 자원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자연 생태계를 존중하는 에코 관광에 대한 필요성이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 결과 발리 고유의 계단식 논을 훼손 없이 조망하면서 현지에서 재배된 커피를 합리적인 가격에 즐길 수 있는 농업형 관광 카페가 등장하는 등 민간에서 자발적 참여가 확대되고 있다.
이와 함께 동남아를 강타 중인 스타트업 열풍 역시 사회 발전 운동의 진화에 촉매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바로 인터넷 및 모바일로 사회 운동의 활동 무대가 전례 없이 넓어지고 있는 것. 전반적인 경제력의 향상과 더불어 디지털 경제의 보급이 확산되면서 끼따비사닷컴과 같은 소셜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은 이미 기존 아날로그 모델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여기에 말레이시아, 태국 등을 중심으로 사회적 기업을 표방하는 스타트업이 증가하면서 이들을 위한 전문 협업공간도 하나 둘씩 선보일 정도다.
전자 결제, P2P 대출 분야를 위주로 한 핀테크 스타트업의 잇따른 출현도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싱가포르 등을 제외한 동남아 대부분 지역은 신용카드 보급률이 한 자릿수에 불과하고, 개인 신용 평가 시스템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국민들의 금융 문맹률이 높고 관련 인프라도 부족한 현실에서 금융 서비스 접근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스마트폰 사용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데 힘입은 핀테크 스타트업들이 국민들의 금융 지식을 메워주는 서비스를 출시하면서 사회 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 정부가 사회적 기업 육성 방침을 밝히는 등 사회 발전 운동을 가속화시킬 법적ㆍ제도적 환경이 개선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도 속속 들려온다. 동남아 사회 발전 운동이 어디까지 진화할지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방정환ㆍ아세안 비즈니스 센터 이사ㆍ ‘왜 세계는 인도네시아에 주목하는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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