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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약국민동맹회의’를 아십니까

입력
2017.08.09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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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도 무장투쟁을 주장해 이승만과 갈등을 빚었던 독립운동가 박용만은 뉴욕에서 열린 소약국민동맹회의에 참석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미국에서도 무장투쟁을 주장해 이승만과 갈등을 빚었던 독립운동가 박용만은 뉴욕에서 열린 소약국민동맹회의에 참석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드로 윌슨(1856~1924)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은 3ㆍ1운동의 종착역은 파리강화회의였다. 성과는 없었지만, 국제정세에 눈을 뜨게 된 계기로 꼽힌다. 그러나 그 전에 한 단계가 더 있었다. 1917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소약(小弱)국민동맹회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1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3ㆍ1운동 전후 국제정세의 변화와 한국 독립운동’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 이 학술대회에서 파리강화회의, 워싱턴회의,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 등과 함께 소약국민동맹회의가 다뤄진다. 홍선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이 주제발표를 한다.

홍 위원에 따르면 소약국민동맹회의는 1917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공개 이후 미국 내 25개국 약소민족 대표들이 결성했다. 여기엔 한국뿐 아니라 아일랜드, 핀란드, 인도, 리투아니아 등이 포함됐다.

이 회의에서 눈길을 끄는 인물은 독립운동가 박용만(1881~1928)이다. 무장투쟁을 주장하다 외교노선을 고수한 이승만에게 밀려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박용만이 소약국민동맹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것이다. 홍 위원은 그 동안 내부 문제에만 치중했던 한국인들이 우리나라의 독립 문제를 전반적인 국제 정치의 흐름 속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 데에는 파리강화회의 못지 않게 소약국민동맹회의 또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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