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7세기 발트해와 북해 연안 북유럽에서는 ‘한자동맹’이라는 도시 간 무역동맹이 형성되었다. 전성기에는 거의 100여 도시의 상관(商館)을 독점적으로 연계, 한때 역내 국가들과 경쟁할 정도로 위세를 떨친 한자동맹은 독일과 노르딕 국가들, 영국, 벨기에 그리고 네덜란드의 주요 경제권을 아우르는 공동체를 형성했다가 민족국가의 대두와 새로운 무역로의 개발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유럽의 잊혀진 역사가 된 한자동맹이 수백 년이 지난 후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에 새로이 떠오르고 있는 동북아와 극동지역 경제협력 논의에 영감의 단초를 던져준다. 지정학적 긴장관계가 본격적 지역경제권 형성에 장애가 되고 있으나, 역내 경제 네트워크 활성화를 통한 새로운 성장동력과 한반도 평화구축 기반 마련이라는 목표는 여전히 주요한 과제다.
오늘날 유럽연합을 탄생시킨 유럽 지역경제의 통합은 역사적 경험에 기반한 다수의 정치, 경제적 네트워크에 터잡았다. 중세시대에 번영을 누린 한자동맹은 상품 교역과 상관 운영에서 상당한 수준의 제도화, 표준화를 이루었고, 담당 인력 또한 오랜 시간에 걸쳐 양성됐다. 신분상승 기회가 제한된 소위 흙수저 소년들이 수년간의 혹독한 견습 과정을 통해 상인계급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유럽통합의 기원인 석탄철강공동체 역시 1920년대부터 형성된 유럽 지역 내 철강 카르텔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지역경제협력은 원점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기존 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할 때 성공 가능성이 커진다.
동북아의 특수성은 이런 민간ㆍ도시차원 협력을 어렵게 만들어 왔다. 냉전시기부터 이어진 역내 국가 사이의 정치적 갈등과 상이한 경제 체제가 주된 걸림돌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정치적 점프 스타트가 필요하고, 한국이 추진하고자 하는 동북아 지역협력과 북방외교 전략도 이런 역할을 담아낼 것이다. 고속 성장한 중국 동북 3성 지역은 점점 한국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워지고 지고 있다. 북·중·러 접경지역의 개발은 오랜 논의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수요와 경제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러시아 천연가스 도입은 상업성, 지정학, 그리고 북한 문제라는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할 난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북3성과 극동러시아, 그리고 환황해 경제권은 모두 중장기적 한국경제권 확대에 불가결하다.
지역협력의 요체는 결국 민간 부문의 자발적 참여 네트워크 형성에 달렸다. 정치적으로 추진되는 대형 프로젝트가 대동맥이라면, 민간 차원의 다양한 연계는 실핏줄과도 같다. 생명력을 지닌 지역경제권의 형성을 위해서는 국책사업뿐만 아니라 실핏줄 같은 다층적, 수평적 연계가 있어야 한다. 정부의 지원과 추진력은 초기단계에서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민간의 추진동력과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실효성이 없다. 어렵게 마련한 정치적 돌파구가 관료적 성격의 기구 설립이나 관리체제로 바뀌는 순간 그 동력이 상실될 수도 있다.
개별 프로젝트와 이벤트를 넘어서 지역경제협력은 금융과 인적자원, 그리고 교역대상자들의 신뢰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고 그만큼 금융, 물류, 자원 등에 특화된 인력을 키워내고 그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충분히 씨를 뿌리고 추수를 기다리는 인내가 동북아 경제협력의 요체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내의 많은 젊은 인력들이 참여하고 성장해야 한다.
국가 형성이 미비했던 시기에 만들어진 북유럽 경제권의 형태가 오늘날 그대로 적용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실질적 이해관계를 토대로 한 민간ㆍ도시경제의 유기적 연계는 앞으로 한국이 참여하고 주도해야 할 동북아 경제협력의 모습이기도 하다. 북해의 거친 파도와 발트해의 매서운 바람을 헤치며 촘촘한 지역경제권을 개척한 한자동맹과 같은 수평적 네트워크 형성이 한국이 염두에 두어야 할 동북아 경제의 항해 지도가 될 것이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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