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역사의 계절이 다가왔다. 해마다 8월 중순이 되면 한국과 일본은 양국 수뇌가 어떤 역사관을 피력하는가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른바 대통령의 광복절기념사와 총리의 전몰자추도사 등이다. 올해는 한국과 일본에서 새 대통령과 새 내각이 등판하게 되므로 조금 긴장하는 분위기이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은 무척 다르다. 국가의 내력과 민족의 경험이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최근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이 서로 수렴해온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특히 일본의 역사인식이 한국 쪽으로 많이 접근했다. 역사인식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그것이다. 1990년대 이래 일본의 역대 총리는 담화나 선언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사죄와 반성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 중에서 중요한 사례를 들어보자.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10월 8일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21세기 새로운 한일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오부치 총리대신은 금세기 한일 양국관계를 돌이켜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오부치 총리대신의 역사인식 표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평가하는 동시에,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뜻을 표명하였다.”
이 ‘공동선언’은 한국과 일본이 처음으로 합의하여 역사인식을 표명하고, 그것을 문서로 만들어 양국 국민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 공표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또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은, 이 ‘공동선언’의 역사인식은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총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평양선언’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한국과 일본은 1965년 6월 22일 국교수립조약(‘한일협정’)을 맺으면서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이해와 평가에서 정면으로 맞붙어, ‘사죄와 반성’은커녕 ‘식민지 지배’라는 단어조차 집어넣지 못했다. 그로부터 삼십 수년이 흘렀다. 일본의 역사인식이 ‘공동선언’처럼 개선되는 데는 일본의 경제성장, 민주발전, 의식향상 등이 작용했지만, 필자를 비롯한 유지들의 역사연구와 역사대화도 큰 몫을 했다고 자부한다. 또 정부끼리도 끈질기게 교섭과 타협을 되풀이한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역사인식이 한국에 가장 접근한 것은 2010년 8월 10일, 간 나오토 총리가 ‘한국병합 100년’을 맞아 발표한 담화이다. 길지만 중요하므로 인용하겠다. “금년은 한일관계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해입니다. 정확히 100년 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이후 36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었습니다. 3ㆍ1독립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에서도 나타났듯이, 정치ㆍ군사적 배경하에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이루어진 식민지 지배로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는 역사에 대해 성실하게 임하고자 생각합니다. 역사의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와 이를 인정하는 겸허함을 갖고, 스스로의 과오를 되돌아보는 것에 솔직하게 임하고자 생각합니다. 또한 아픔을 준 쪽은 잊기 쉽고, 받은 쪽은 이를 쉽게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러한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다대한 손해와 아픔에 대해, 여기에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심정을 표명합니다.”
‘간 담화’가 ‘공동선언’보다 진보한 것은 ‘식민지 지배가 정치ㆍ군사적 배경 아래 한국인의 뜻에 반하여 이루어졌다’ 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일본정부가 그때까지 줄기차게 주장해온 논리, 곧 ‘식민지 지배가 병합조약에 의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인식에 변화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간 담화’가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당 정부는 자민당 정부로 교체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간 담화’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별로 없다. 그렇지만 엄연히 각의결정을 통해 발표한 총리의 담화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역사수정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현재의 아베 총리조차 역대 정부의 역사인식을 계승하겠다고 공언하지 않았는가!
아마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금쯤 누군가가 ‘기념사’와 ‘추도사’를 작성하고 있을 것이다. 새롭거나 특별한 내용을 집어넣으려고 애쓰지 말고, ‘공동선언’이나 ‘간 담화’를 꼼꼼히 검토하면 거기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8ㆍ15 특집을 준비하는 매스컴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과 일본이 역사인식을 둘러싸고 싸운 것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어느 선까지 접근했는가도 사실에 근거하여 살펴보라고 권하고 싶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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