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A씨는 촬영 장면을 모니터하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들려오던 얘기를 듣고 충격 받았다. 여배우의 신체 부위에 대해 성적인 농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 제기를 하지 못했다.
#배우 B씨는 감독에게 잠자리를 요구 받고 영화에서 중도 하차했다. 출연료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계약서를 쓰지 않았던 탓이다. 촬영 과정에서 다쳐서 병원비를 받은 게 전부였다.
김기덕 감독이 영화 ‘뫼비우스’(2013) 촬영 중 연기 지도라는 명목으로 여배우의 뺨을 때리고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베드신 촬영을 강요한 혐의로 최근 피소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영화계의 성폭력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신고나 소송을 통해 밖으로 피해 사실이 알려진 사례가 많지 않았을 뿐, 촬영 현장 안팎에서 벌어지는 물리적ㆍ언어적 성폭력은 비일비재하다는 게 영화 관계자들의 얘기다.
지난해에는 한 남자배우가 영화 내용 중 가정 폭력을 묘사한 장면에서 사전 협의와는 전혀 다르게 상대 여배우의 속옷을 찢고 신체를 만지는 등 성추행을 해 피소된 사건이 있었다. 1심 재판부는 저예산 영화의 시공간상 한계 등을 이유로 남자배우의 행위를 ‘배역에 몰입한 연기’로 판단, 무죄를 선고해 영화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영화 ‘전망 좋은 집’(2012)에 출연한 배우 곽현화도 이수성 감독과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곽현화는 극장 개봉 당시엔 편집된 노출 장면이 자신의 허락 없이 감독판에 추가돼 IPTV로 공개됐다면서 이 감독을 형사고소했다. 1심은 이 감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장면임에도 사전 협의 없이 즉석에서 연기를 요구 받는 일은 감독의 연출권이란 이름 아래 종종 벌어지고 있다. 남성 스태프가 어린 여성 스태프를 술자리에 부르거나 성희롱적 발언을 하는 일도 다반사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간 이런 문제들을 성폭력으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기는 쉽지 않다. 혹시 촬영이 지연되기라도 하면 고스란히 제작비 부담이 늘어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만 참으면 모두가 편하다’는 식의 고압적 분위기도 문제 해결을 가로막고 있다. 문제 제기를 했다가 떠안게 될 불이익을 우려해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저예산영화 현장의 경우 열악한 환경 때문에 성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크다.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영화노조) 위원장은 “현장에선 그날의 촬영 계획을 마치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그 밖의 문제들은 덮어두거나 경시하는 경우가 많다”며 “스타 배우가 아닌 이상 상대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배우와 스태프가 현장에서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성적 수치심에 ‘뫼비우스’ 출연을 중도 포기했다고 주장하는 여배우도 지난해 말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를 중심으로 진행된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보고 4년 만에 뒤늦게 용기를 내 관련 단체에 신고했다.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오랫동안 감춰지거나 묵인됐던 영화계의 성폭력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영화계는 보다 적극적으로 인식 개선과 제도 정비를 요구하고 있다.
안 위원장은 “배우의 노출 수위는 물론이고 구체적인 연기 내용까지 세세하게 출연계약서에 명시해야 하고, 촬영장에서 불가피하게 촬영 내용이 변경되거나 추가될 때는 계약서를 다시 작성하거나 합의 내용을 문서로 남기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안 위원장은 “계약 주체들의 약속 이행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현실 인식을 바꾸기 위해 당사자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성영화인모임과 영화노조 등 영화단체들은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와 함께 지난 6월부터 영화계 성폭력 실태 파악을 위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10월 초에 결과가 나오면 이를 바탕으로 범 영화계 성폭력 대응기구를 구성할 계획이다.
영진위는 올해부터 제작지원 모집요강에 지원자가 성범죄 관련 확정판결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요건을 추가했다.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즉시 지원사업에서 배제된다. 또한 제작지원을 받는 감독과 제작자, 프로듀서가 성폭력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했다. 피해자 구제를 위한 법률지원도 하고 있다. 한인철 영진위 공정환경조성센터 소장은 “관행과 관습, 예술이란 이름으로 성폭력이 묵과되지 않도록 제도적 정비를 하고, 사업 예산에도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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