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갑과 을의 건강한 공생은 불가능한가?
‘갑질’과 관련한 우울한 소식이 계속되고 있다. 살아감에 있어 갑(甲)과 을(乙)은 늘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원래 갑과 을은 계약에 있어 규정되는 관계로 상이한 역할을 수행하는 대등한 관계라 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관계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갑과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을이 존재한다. 하지만 갑과 을의 위치는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의 경우, 특정한 물품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수요가 많을 때는 공급자가, 공급이 넘칠 때는 수요자가 갑의 위치에 들어선다. 또, 데뷔를 앞두고 연습중인 미래의 아이돌(idol)은 기획사와 방송국의 을이지만, 대중의 인기를 얻고 난 이후에는 오히려 모든 선택과 결정에 있어 갑이 된다.
늘 있어왔고, 또 상황에 따라 변화하게 되는 갑과 을의 관계이건만 왜 갑자기 ‘갑질’로 인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부각된 것일까?
우선 과거에 비해 개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욕구나 기준이 높아진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성숙의 과정에 들어선 시민의식은 이유없는 부당함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한다. 제도권 내에서의 교육 효과도 있겠지만, 수많은 채널을 통해 접하게 되는 다양한 정보가 이러한 역량의 마련에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숙한 시민의 자질은 자신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함께 타인에 대해서도 존중과 배려가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갑질’에서 느껴지는 부당한 압력의 문제는 결국 권력의 유무에서 비롯된다. 동원할 수 있는 자원(資源)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간의 차이는 불평등한 관계를 낳게 되고, 불평등한 관계는 권력의 문제로 이어진다. 부당한 압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안적 자원의 마련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기에 수직화된 갑을 관계는 공고화(鞏固化)된다. 게다가 장기화된 경기침체와 불황이 새로운 대안을 가로막고 있고, 왜곡된 갑을 관계를 양산하는 기반으로 작동한다.
우리 사회에서 ‘갑질’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언제부터이고, 또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 심각성이 논의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아울러, 갑질과 관련하여 뉴스기사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나타난 얘기들은 무엇인지 파악해보았다.
2013년부터 갑질이 기사에 등장
갑질에 대한 보도가 시작된 것은 2013년 5월이었다. 남양유업의 대리점 밀어내기 사태와 여객기에서 라면을 제대로 끊여주지 않았다고 승무원을 폭행한 소위 ‘라면상무’사건이 대표적이다. 이후 2014년 12월, 갑질과 관련하여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이 보도된 대한항공의 ‘땅콩회항’사건이 나타났고, 어려운 취업 상황을 이용하여 청년 구직자들을 대상으로 비합리적인 저임금노동을 당연시하는 ‘열정페이’문제, 그리고 백화점 주차장에서 주차관리원을 무릎꿇게 만든 ‘백화점 모녀 사건’ 등도 대표적인 갑질 관련한 사건이다.
이후에도 자신이 운영하는 골프장의 캐디를 폭행한 사건부터 최근의 각종 프랜차이즈 가맹점에 대한 횡포와 함께 군 관사의 공관병에 대한 부당한 노동을 강요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서 갑질에 대한 고발과 문제제기는 계속 되어 왔다.
근원적 대책보다는 현실에 대한 비난만 존재
갑질 관련 보도에 나타난 연관어들을 살펴보았다. 갑질과 관련한 주요 사건 내용과 가해자, 피해자들이 언급된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의 ‘우월적지위’를 발판으로 나타났던 ‘땅콩회항’사건이나 ‘백화점 모녀’사건이 대표적이었고, 갑질의 직접적 피해자인 ‘운전기사’, ‘가맹점’, ‘경비원’, ‘공관병’ 등이 함께 추출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일반 국민들의 SNS상에서도 비슷하게 보여진다. 지난 1년간(2016년8~2017년7월) 갑질과 관련하여 나타난 연관어들을 보면, 기사에서보다 훨씬 다양한 대상과 문제에 대해 언급이 이루어졌다. 갑질과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된 키워드는 ‘부인’이었는데, 내용적으로 살펴보니 지난 대선 당시 한 대통령후보의 부인이 자신의 업무를 국회의원 보좌관에게 시킨 사건과 함께, 공관병에게 인격적 모욕과 함께 부적절한 노역을 강제한 군장성의 부인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기업의 이름과 갑질의 내용(협박, 돈, 상전질, 폭언, 횡포, 밀어내기, 강요, 성추행)도 함께 추출되었는데, 아쉬운 점은 이에 대한 비난은 있었지만 ‘불매’나 ‘과징금’을 제외하고는 갑질에 대한 대안과 대책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갑질의 퇴출을 위해 적어도 두 가지는 동시에 필요할 듯하다. 하나는 이미 많이 제시되었지만, 시장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갑질을 제어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공정위의 권한을 강화하고, 불공정한 관행에 대해 무거운 처벌을 엄격하고 투명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인식과 실천의 문제이다. 공생(共生)의 가치에 대한 자성적 성찰이 필요하다. 을이 없는 갑은 더 이상 갑이 아니다. 자신의 권리에 대한 인식의 제고는 그간 많이 진전된 만큼, 타인의 권리와 역할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질 차례이다. 자신과 관계하는 상대방의 역할에 대해 제대로 된 기준의 정립과 이해만이라도 마련된다면 건강한 공생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배 영(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교수)
----------------
데이터 출처:
※ 뉴스 기사 데이터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빅카인즈서비스를 활용하여 1990년 1월 ~ 2017년 7월을 대상으로 방송보도 및 신문 기사에서 추출하였음. 아울러 트위터 자료는 조사전문업체인 닐슨코리안클릭(koreanclick.com)의 버즈워드(Buzzword)데이터를 이용하여 2016년 8월 1일 - 2017년 7월 31일까지를 대상으로 추출함.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