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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유럽] 동부 유럽 왜 이러나... 무기력한 EU

입력
2017.08.0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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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폴란드 바르샤바 대법원 앞에서 사법개혁 반대시위가 열린 가운데 한 참가자가 "유럽, 법과정의당(PiS)은 폴란드가 아닙니다. 떠나지 말아주세요"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바르샤바=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7월 22일 폴란드 바르샤바 대법원 앞에서 사법개혁 반대시위가 열린 가운데 한 참가자가 "유럽, 법과정의당(PiS)은 폴란드가 아닙니다. 떠나지 말아주세요"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바르샤바=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유럽연합(EU), 제발 우리를 도와 주세요.’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선 지난 7월 내내 집권 법과정의당(PiS) 정권이 추진한 ‘대법원 개혁법’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법안이 의회를 통과한 22일에는 폴란드 민주화의 상징인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마저 거리로 나섰다. 시위대는 정부가 대법원에 자기 편 판사만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쥐고 삼권분립을 무시하려 한다며 법안 폐기를 요구했다. 시위대 가운데는 EU 회원국인 자국이 EU 근본 가치를 훼손했다며 EU가 현 정부를 제재해 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나온 이도 있었다. 그러나 법과정의당 정권은 2015년 10월 집권 이래 EU 개입을 맹비난하며 이를 국내정치 카드로 적극 활용해 왔기에 EU의 힘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법과정의당의 대법원 개혁법안은 전 정부가 임명했던 대법원 판사를 물러나게 하고 법무부 장관에게 대법원 판사 전원 교체 권리를 부여한 것이다. 이와 함께 폴란드 의회는 판사를 임명하는 국가사법위원회의 위원 임명권을 의회에 주는 법률안과 반년 안에 대법원을 제외한 하급 법원장 교체 권한을 법무장관에게 부여하는 법률안도 통과시켰다. 세 법안 모두 행정부가 법원을 장악하겠다는 의도가 명확하다. 더구나 폴란드 대법원은 각종 선거 결과를 최종 확인하는 선거관리위원회 역할도 일부 겸한다. 결국 선거 결과까지 좌지우지하겠다는 뜻이다.

민주주의 훼손은 동유럽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헝가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미국의 백만장자이자 자선 사업가 조지 소로스를 적으로 삼았다. 수십억 원을 들여 수도 부다페스트 곳곳에 소로스가 ‘불법 난민’의 정착을 지원하는 민간단체를 도와주고 있다고 비난하는 포스터를 붙이게 했다.

오르반이 소로스를 겨냥한 것은 자신의 권력 강화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헝가리 출신 유대인인 소로스는 2차대전 때 미국으로 망명했다. 헤지펀드를 성공적으로 운영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그는 1988년 조국이 민주주의 시장경제로 전환을 시작하자 이를 적극 지원해 왔다. 그가 1991년 설립한 중부유럽대학(Central European University, 일명 ‘소로스 대학’)은 서유럽과 미국의 우수한 학자들을 교수로 초빙해 헝가리 관료와 학자들을 집중 양성했다. 소로스는 또 열린사회재단을 설립해 동유럽 전환경제 국가들의 민간단체를 지원해 왔다.

소로스 대학과 그가 지원해 온 민간단체가 자신의 권위주의 정치를 비판하자 오르반은 지난 2월 외국대학의 자국 내 등록을 까다롭게 하는 교육법을 제정했고 외국의 지원을 받는 민간단체는 기부자의 이름을 전면 공개토록 하는 민간단체법도 만들었다. 두 법 모두 목표는 소로스였다. 국내에서 비판이 들끓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 등 동유럽 3국은 EU가 합의한 난민 공동 분담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2015년 9월 EU는 그리스와 이탈리아에 집중돼 있던 중동ㆍ아프리카 난민을 회원국의 인구와 경제력에 따라 분담하기로 합의했다. 헝가리는 1,294명, 체코는 1,591명, 폴란드는 5,082명을 수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까지 한 명의 난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르반 총리는 “난민수용을 요구하는 것은 테러리스트를 지원하는 것”이라는 지지자 규합용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3국이 난민 수용을 계속 거부하자 결국 EU 집행위원회는 칼을 빼 들고 지난 달 13일 이들 3국에 대한 ‘법률위반 절차’를 개시했다. 집행위는 EU회원국들이 EU 조약이나 규정 등을 위반한다고 판단하면 이 절차를 통해 시정조치를 요구한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유럽사법재판소(ECJ)에 제소돼 이 판결을 따라야 한다.

EU는 폴란드가 ‘EU 근본 가치’를 위반했다는 판단 하에 회원국 장관 모임인 각료이사회 등 주요 기구에서 발언권을 제한하고 다른 회원국들과 이들의 접촉을 제한하는 초강경 제재도 검토 중이다. 하지만 28개 회원국 중 80%가 찬성해야 회원국이 이런 가치를 위반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제재를 가하려면 만장일치가 돼야 한다(리스본조약 7조).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가 이미 폴란드의 입법을 지지한다고 천명한 상황에서 이 제재는 실행이 매우 어렵다.

‘문제아’ 3국을 포함한 중ㆍ동유럽 8개국은 2004년 5월 EU에 가입할 때만 해도 ‘민주화 모범생’이었다. 2차대전 후 소련의 압제에서 40년 넘게 신음하다가 1980년대 말 민주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한 후 서유럽과의 경제교류 확대를 위해 EU 가입에 적극적이었다. 낙후된 지역이기에 가입 이후로는 해마다 막대한 EU예산을 지원 받아 왔다. 하지만 이제는 회원국 권한을 적극 이용해 EU를 무기력하게 하고 있다.

다행히 안드레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하급법원장의 교체법안에만 서명하고 나머지 두 법안에는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집권당 출신 대통령조차 국내외의 반발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같은 달 29일에는 EU 집행위원회도 법원 개혁법이 삼권분립을 위반한다며 폴란드 정부에 이 법안의 수정을 요구하는 정식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앞선 지역통합을 성취한 EU조차 회원국 제재는 실효성이 떨어진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EU가 제도 개선을 검토하겠지만 이 역시 쉽지는 않을 듯 하다.

안병억 대구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ㆍ안쌤의유로톡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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