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링허우
양칭샹 지음ㆍ김태성 옮김
미래의창 발행ㆍ312쪽ㆍ1만4,000원
중국은 한숨을 겉으로 쉬지 않는다. 불만, 불평, 한숨은 대국의 수치다. 국가의 입 단속은 개개인의 윤리로 체화돼 감히 누구도 정부를 향해 불만을 털어 놓지 못한다. 때로는 불만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기도 한다.
런민대 문학원 부교수인 양칭샹도 2008년까지는 조국을 진심으로 자랑스러워 했다. 마침 베이징올림픽이 열리던 때, 그는 북적거리는 카페에서 개막식을 보며 한껏 들떴다. 중국이 나고, 내가 곧 중국이었다. 뜨겁게 달궈졌던 심장은 그러나 2년 만에 식어버렸다. 집주인이 월세를 올리는 바람에 일주일 안으로 집을 비워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 ‘바링허우’는 우리 말로 1980년대생을 뜻한다. 그 동안 미디어가 비춘 바링허우의 모습은 한 마디로 풍요로운 세대다. 우리가 명동과 홍대에서 본 유커들 중 상당수가 이 바링허우에 속할 것이다. 혁명의 핏빛 기억이 없는 이들은 인터넷 쇼핑과 해외 직구에 익숙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 소비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기적이고 사회참여의식이 부족하다는 기성세대의 지적은 2000년대 초반 국내에서 유행했던 ‘20대 X새끼론’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그 자신이 80년생인 양칭샹은 바링허우로서 직접 자기 세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책에는 바링허우에 대한 저자의 고찰과 그가 만난 바링허우 5명에 대한 인터뷰가 함께 실렸다. 저자의 눈에 비친 바링허우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끼어 질식 직전이다. 부모 세대인 우링허우(1950년대생)는 비록 가난했을지언정 시장경쟁으로 피를 말리지는 않았다. 문화대혁명과 대기근의 상처가 깊었지만, 이는 ‘내가 곧 중국’이라는 주인의식의 단단한 근거가 됐다. 그러나 바링허우에게 허락된 역사적 경험이라곤 쓰촨 대지진 때 자원봉사를 한 정도다. 이들 앞에 놓인 건 자본주의의 무한경쟁, 이미 올라갈 사다리가 끊어진 계급ㆍ계층의 격차,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공산당 정부다.
민주주의의 감시 없이 자본주의 체제가 도입됐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바링허우들은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저자가 인터뷰한 한 80년생 남자는 스무 살 때 일자리를 찾으려고 간 타지에서 임시거류증이 없다는 이유로 치안대에 끌려간다. 사복을 입은 정체불명의 치안대는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거류증을 찢어버리고 유치장에 가둔 뒤 돈을 받고서야 풀어준다. 간신히 첫 직장을 잡은 1999년, 그는 회사 TV를 통해 톈안먼 광장에서 열리는 열병식을 본다. 중국이 군사굴기를 자랑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에 그는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다고 말한다. “화면 속의 광경이 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밥도 제대로 못 먹는 형편이었거든요.”
양칭샹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런민대 박사과정을 수료한 그는 학교가 강사들에게 배정해준 작은 방에서 살았으나, 2004년 국가의 주거개혁으로 혜택이 사라지면서 월세에 쫓겨 다니기 시작했다. 첫 집은 3층 건물에 공용화장실이 하나뿐이라 15분 간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서 목욕을 했다. 두 번째 집에선 불투명 유리로 칸을 나눈 방을 낯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썼다. 세 번째 집에서 쫓겨난 2011년 1월, 그는 TV에서 60초짜리 국가 선전 영상을 본다. 국무원이 후진타오 당시 국가주석의 미국 방문을 기념해 뉴욕 타임스퀘어의 대형 모니터에 띄우기 위해 제작한 영상이었다. 농구선수 야오밍을 비롯해 세계에 이름을 떨친 자랑스런 중국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양칭샹은 그제서야 인정한다. 중국은 자신이 아니고 자신은 중국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실패란 말을 입에 올린다. “개인이 본인의 실패를 전적으로 사회적인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사회 역시 개인의 실패를 완전히 각 개인의 탓으로만 돌려서도 안 된다.”
저자는 조국의 역사를 조롱하고 계급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데 혈안이 된 바링허우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조명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국가에서 찾으며 바링허우들이 더 사회참여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의 주장은 한국 독자의 눈에 새롭지는 않다. 그가 쓰는 “진정한 자아의식” “‘깊이 있는 성찰” “진실한 저항”은 지난 세기에 이미 많이 들은 말이다. 우리는 그 말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했는지까지도 알고 있다. 진정함, 진실함, 깊이 있는 이라는 표현 자체가, 다음 조롱의 대상이 될 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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