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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세상에서 가장 큰 책

입력
2017.08.03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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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는 나그네 모습으로 떠나야 한다. 짬을 내서 휴가의 길을 나서면서도 일상을 벗어난 자유의 깃발 뒤에 벌써 조그만 목적도 숨겨져 있다. 처음 느꼈던 감동을 갈무리하지 못해 3년 만에 일본 나오시마를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아내와 미국 대학교수가 된 아들과 함께했다. 40년 가까이 언론출판으로 살아남았으면 됐지, 지금 또 몇 년째 20만 평 수목원 축성에 매달리는 ‘나무 심는 마음’을 이 섬에 얽힌 아름다운 인연을 빌려 공감했으면 싶기 때문이다.

일본 베네세 출판그룹 후쿠다케 소이치로 회장이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손잡고 버려진 땅을 20여 년 만에 예술의 섬으로 일궜다. 학습지 출판으로 축적한 자본으로 산업쓰레기로 덮인 섬을 복원하여 청소년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아버지와, 대를 이은 아들의 꿈이 실현된 곳이다. 인간답게 살자는 아름다운 분노의 승리다. 예술은 눈 밝은 선각자의 후원으로 비로소 꽃을 피운다. 우리는 얍삽하게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후원가들 덕택으로 문화창달의 혜택을 누린다. 10여 년 전부터 조성한 원주 오크밸리의 거대한 한솔뮤지엄의 안도 다다오 작품들도 그러하다. 나에게 나오시마는 대기업이 아닌 출판자본으로 세상에서 가장 큰 책의 꿈을 이루었기 때문에 더한 애정으로 다가온다.

처음 안도 다다오를 접한 것은 15년 전 파주 출판도시에 사옥을 지을 때이다. 그의 노출 콘크리트 기법과 빛의 미학이 유행처럼 번졌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출판도시 설계를 안도 다다오와 비슷한 건물로 채우려는 건축가의 조급증도 보였다. 베네세 사람들과 안도 다다오의 토털디자인은 예술작품이 평화롭게 돋보이도록 오랜 시간 미술관을 디자인한 점이 특징일 것이다. 베네세하우스 뮤지엄은 섬의 조망이 뛰어난 동(銅)제련소가 있던 곳이다. 고즈넉하게 안긴 난해한 현대 예술품과 이를 담은 안도 다다오의 전시공간 중 어느 것이 더 예술적인가를 가늠하려는 생각은 부질없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훨씬 큰 또 다른 공명과 떨림을 주기 때문이다. 안도 다다오의 의도대로 다리품을 팔며 그냥 그의 빛의 길을 따라가면 된다. 클로드 모네, 월터 드 마리아,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품에 안은 지추(地中)미술관은 더욱 그러하다. 이 섬의 복원된 자연환경에 평화로운 내면의 울림이 녹아 들게 한 조화의 미학에 기립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지추미술관 앞의, 그냥 지나칠 뻔한 길가의 연못이 ‘수련’을 그린 모네의 영혼이 담긴 정원 지베르니와 똑같다고 한다.

이우환 미술관 앞 넓은 잔디밭에 큰 돌과 거대한 솟대 같은 철주의 구성에 주눅이 들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자궁 같은 미술관도 그이와의 우정인지 명상센터 같은 예술의 합작품처럼 안겨 왔다. 이우환 화백의 명성을 이곳에서 알게 된 나의 무지가 부끄러워 서울에서 그이의 판화 한 점을 구해 마음을 달랜 적도 있다. 이제는 작년에 문을 연 부산시립미술관의 이우환 공간이라도 쉽게 찾을 일이다.

예술섬을 만든 사람은 어쩌면 실제 삶을 영위하는 섬 주민들의 문화의식일 수 있다. 20여 점의 야외작품 중 ‘호박’ 작품이 눈에 띈다. 나오시마 항구 앞의 쿠사마 야요이의 ‘점박이 빨간 호박’ 속에 들어가 바깥공간에 나를 그릴 일이다. 베네세하우스 앞의 지중해 같은 바닷가를 산책하다 불현듯 앞을 가로막는 푸른 물결에 떠 있는 듯한 그의 유명한 ‘점박이 노란 호박’의 상상력 공간은 유쾌했다.

돌아오는 길에 찾은 다카마쓰 중심지의, 30만 평 규모 리쓰린(栗林) 공원 호숫가의 웅장한 소나무 조경은 경이로운 감상을 압도했다. 낯선 곳에서 찾은 400년의 감동이 내가 꿈꾸는 세상에서 가장 큰 책으로 가슴 가득 안긴다. 나에게 주어진 길을 가야 한다. 오늘 밤에도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조상호 나남출판ㆍ나남수목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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