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8월 3일 독일 베를린스타디움에서 열린 올림픽 육상 100m 결승에서 23세의 미국 국가대표 제시 오언스(James Cleveland ‘Jesse’ Owens)가 10.3초 기록으로 우승, 금메달을 땄다. 다음날 열린 넓이뛰기(8.06m)와 5일의 200m(20.7초), 9일의 400m 계주(39.8초)까지 석권하며 그는 4관왕이 됐다. 계주 기록은 칼 루이스가 활약한 84년 LA올림픽까지, 넓이뛰기 기록은 1960년 로마 올림픽(랠프 보스톤, 8.13m) 때까지 깨지지 않은 세계신기록이었다. 그 해 미국 대표팀이 딴 금메달 11개 가운데 6개를 흑인 선수들이 땄다. 육상 100m 결승 직후 히틀러가 오언스와 악수하는 걸 거부했다는 설이 지금도 도는 건, 그가 아리안 민족 우수성의 선전장이 될 것이라 선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언스는 훗날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오언스는 앨라배마 오크빌(Oakville)의 한 소작농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당연히 노예였다. 몸이 약하고 기관지염을 달고 살았지만, 근성이 있었던지 7세 무렵 하루에 목화 100파운드를 수확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가족은 아홉 살에 오하이오 클리블랜드로 이사했다. 전학한 학교에서 이름 약자 ‘J.C’를 말했는데, 교사가 그의 투박한 남부 액센트 발음을 ‘Jesse’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제시’는 평생 그의 애칭이 됐다.
30년대의 미국은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때였고, 더욱이 남부였다. 육상 4관왕의 카퍼레이드는커녕 형식적 환영대회도 없었고, 그는 언제나 그랬듯 버스 뒷문으로 승차해야 하는 흑인이었다. 2016년 미주한국일보의 자녀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대회 직후 뉴욕에 돈 벌러 가서 사전에 약속된 어떤 일을 했지만 뜻대로 안 됐고, 유명 흑인 연예인 빌 보쟁글스 로빈슨을 만나 춤도 추고, 연주도 못하는 색소폰을 들고 밴드 리더로도 일했다고 한다. 자동차나 말과 경주하는 일종의 쇼를 하기도 했다. 말년의 그는 홍보 마케팅 업체를 설립해 돈을 벌며, 대중 강연을 했다.
히틀러 악수 거부설을 두고 훗날 그는 “나는 히틀러의 악수 제의를 받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백악관 대통령(당시 F. 루스벨트)의 악수 초대 역시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대통령 자유메달을 수여한 건 76년 제럴드 포드였다.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