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무더위에 지하철 피서 급증
7월 이용객 작년보다 26만명 늘어
형편 나은 노인도 에어컨은 부담
“혼자 있는데 전기세 비싸 못 틀어”
노인 빈곤 드러내는 씁쓸한 단면
이광호(72)씨는 요즘 해가 중천을 향하는 오전 11시면 서울 강북구 수유동 집을 나선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 비닐장판에 몸이 쩍쩍 달라 붙어 집에 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이씨는 신문 하나 집어 들고 지하철4호선 수유역에서 거리낌 없이 안산행 전동차에 몸을 싣는다. 안산에 특별히 볼 일이 있는 건 아니다. 그는 “지하철을 타고 안산까지 다녀오면 족히 3시간은 지나있다”며 “한창 더운 낮 시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어 이렇게 지하철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폭염이 연일 계속되는 올 여름 지하철을 찾는 노인이 지난해보다 늘고 있다. 최고 35도까지 치솟는 무더위를 버틸 재간이 없는 이들이 무료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누릴 수 있는 지하철을 피서지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노인 빈곤의 한 단면”이라는 진단도 있다.
30일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올해 7월 1일부터 19일까지 지하철1~8호선을 찾은 65세 이상 노인(1,060만5,871명)은 지난해 같은 기간(1,034만 6,970명)보다 약 26만명 늘었다. 7월 평균 기온이 올해(26일까지) 26.2도로 지난해 동기보다 1도 정도 올라간 게 한몫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올해 5, 6월 폭염특보 일수는 11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일 더 많을 정도로 더위가 일찍 찾아왔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올해 5, 6월 지하철을 이용한 노인 수(3,611만5,826명)가 지난해 7, 8월보다 300만명이나 많을 정도”라며 “올 여름이 유독 더워 지하철 노인 손님이 그만큼 더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노인들은 한결같이 “집이 제일 덥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질병관리본부 통계를 보면, 2016년 5월부터 8월까지 실내 온열환자(214명) 발생 장소 중 ‘집’이 93건으로 가장 많았다. 지하철2호선 순환선을 타다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장미연(67)씨는 “집에 있다가는 ‘이러다 죽겠다’ 싶어 나왔다”며 “노인정은 나보다 훨씬 연세가 많으신 분들로 북적이고, 카페도 눈치 보여서 낮에 지하철을 3~4시간 타는 게 속 편하다”고 했다.
이들이 집을 나서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전기세 무서워 집에서 에어컨 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하철3호선을 타고 일산에서 압구정까지 갔다가 돌아가는 장모(70)씨는 “아들 집에 함께 살고 있는데 낮에는 나만 집에 있다”며 “혼자 있을 때 그 넓은 집에 에어컨을 틀면 전기세가 많이 나올까 봐 나온다”고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함께 있던 이모(69)씨는 “혼자 살아도 신경 쓰이긴 마찬가지”라며 “괜히 집에만 틀어박혀서 에어컨을 틀어대면 ‘전기세 폭탄’을 맞을까 봐 걱정된다”고 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주위에선 65세가 젊다고 하지만 에어컨 사용비마저 부담될 정도로 경제활동을 못하고 있는 노인들의 빈곤을 드러내는 씁쓸한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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