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월호, 옥시, 메르스 등 잇단 재난에
정부, 제도 불신 커져 사회 불안 기류
안심지수 설문 100점 만점에 43점
#2
“결국 믿을 건 나뿐” 각자도생 선택
화학제품 안 쓰는 노케미족 급증
유모차 공기청정기도 직접 만들어
#3
‘재난 발생 때 도움’ 기대치
정부 28.1점, 자기자신 55.4점
안아키 등 비과학 빠지기도
#1. 두 남매의 엄마이자 고교 교사인 최정연(42ㆍ가명)씨는 ‘걱정부자’다. 평소 안전이슈에 관심이 많았는데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더 예민해졌다. 먹는 것은 물론 피부에 바르거나 입는 제품까지 유해성분이 포함되지 않았는지 깐깐하게 따진다. 미세먼지가 심해지는 봄철엔 일본 기상청 사이트를 비롯한 해외 사이트를 뒤져 정보를 얻고, 창문을 꼭꼭 닫아걸고 아이들 외출을 막았다. 안심하고 쓸 만하다면 해외직구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실 방부제 등 유해성분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꼼꼼히 따지고, 원하는 제품을 해외직구로 사거나, 더 싸게 살 방법을 찾아보는 일이 쉬운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안전문제라 최대한 노력하는 거에요. 아이들이 집밖에서 일본산 생선으로 만든 음식을 안 먹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집에서만이라도 최대한 조심해 먹이려는 거죠.”
이런 최씨를 더 버겁게 하는 것은 주위의 핀잔이다. “뭘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냐”, “유난스럽다”, “맨날 그러면 뭘 먹고 사냐” 등등. 최씨를 유난스럽게 보고, 비협조적인 건 남편도 마찬가지다. “기업, 정부 등이 더 강한 조치와 대책을 마련하지 않아 걱정이 끊이질 않는 건데, 개인을 유난스럽게 취급하니 섭섭하고 답답할 따름이죠.”
#2. 아내가 올 겨울 출산을 앞둔 회사원 이진수(37ㆍ가명)씨도 최근 자주 밤잠을 설친다. 서울 한 병원에서 간호사가 결핵에 걸린 채 신생아, 영아를 돌보다 아이들 80여명이 잠복결핵에 걸려 독한 약을 먹게 됐다는 소식 때문이다. “안 그래도 전세 재계약이며, 사내 근무평가며 고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아내와 아기가 병원조차 마음 놓고 다니기 어렵다는 사실은 정말 큰 스트레스죠.”
한 번 시작된 걱정은 줄줄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제껏 병원에서 인력을 채용할 때 결핵 피부반응 검사도 안 했다는 건데, 그렇게 허술한 게 과연 이것뿐일까’ 등. “일상에서 너무 걱정이 많아 제 성격문제가 아닐까 생각도 했어요. 마음공부도 하고. 그런데 병원 내 감염이든, 주사기 재사용이든 한 번 일이 터지면 일반인은 경과를 자세히 알기도 어렵고, 사후에도 병원이 징벌적 배상 같은 큰 처벌을 받는 것도 아니라 유사사건이 없으리란 확신도 안 들어요. 이런 걱정이 근거가 없는 것 같진 않아요.”
불안 속의 일상이다. 마음 놓고 있다가 큰일 난다며 전전긍긍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각별히 주의해야 할 사안이 하나 둘 늘다 보니 늘 신경이 곤두서고 지친다. ‘이렇게까지 조심해야 하냐’고 방심했다가, 실제로 피해를 입은 사례들을 보곤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성균관대 SSK위험커뮤니케이션연구단이 국내 거주 만 20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인의 안심수준 진단 인식조사’에 따르면, 스스로 진단한 안심지수가 2015년에는 100점 만점에 40.8점, 2016년에는 43.3점으로 낙제점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가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는 응답은 57.2점, ‘사건, 사고, 재난, 재해 예방을 위한 안전조치가 잘 이뤄지고 있다’는 답은 36.6점에 불과했다.
연구단의 책임연구원이자 미디어ㆍ커뮤니케이션 분야 민간 연구소인 ㈜유플러스연구소의 소장인 김원제씨는 위 조사 결과에 대해 “우리 사회가 그만큼 안심사회와 거리가 멀다는 증거”라며 “그간 각종 사건을 거쳐오며 쌓인 불신으로 인해, 지금 당장은 평온한 삶을 살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위험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불안기류가 사회 전반에 형성됐다”고 해석했다. 또 “이런 상황에서 국가, 기관, 언론이 ‘안전’하다고 주장해도 시민들이 이를 믿고 ‘안심’할 수 있느냐 여부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대형사건들’이 불안 씨앗 뿌려
전근대 사회의 전쟁ㆍ역병보다 현대에 새로 등장한 재난ㆍ사고가 더 위험하다는 뜻일까. 한국인이 유독 불안에 시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맞닥뜨릴 위험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불확실성이 커진데다, 재난이 발생하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상황이 불안을 키운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더욱이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에서는 재난과 사고의 뒷수습을 온전히 개인이 떠맡아야 했던 공포스러운 경험이 몇 차례 이어졌다. 국민적 트라우마를 안긴 대형 사건들이 이런 공포와 불안의 확산에 상당히 기여했다.
대표적으로 세월호 참사는 선원만 믿고 제 자리에서 기다리던 무고한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건강을 지키려 한 선량한 소비자들이 치명적 피해를 입었다. 원인이 지목된 후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야 진상을 밝히고 법적 책임을 지웠다. 두 사건 모두 기업의 이윤과 정부의 부패 앞에 국민의 생명이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 주었다. 메르스(MERSㆍ중동호흡기증후군)는 정부의 ‘비밀주의’가 가세해 불안감을 키운 사건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두 번째로 메르스 감염 환자가 많은 국가로 기록되기까지, 초동 대응은 미흡했고, 감염자와 병원 명단은 온 국민이 공포에 휩싸인 후에야 등 떠밀리듯 공개됐으며, 그런데도 국민들에겐 유언비어를 엄벌하겠다는 엄포만 이어졌다.
이런 대형 참사를 목격하며 상처입고 신뢰를 잃은 것은 회복이 쉽지 않다. 안정주 사회안전소통센터장은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세계적으로 한국에서만 발생한 사건으로, 기업은 유해물질을 팔고 정부는 판매 개시 후 아무 제어를 못한 장면을 생생히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의 위험관리 능력에 국민들이 회의와 불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이런 경험으로 현대 과학기술이나 우리 법과 제도가 전혀 위험을 통제할 수 없구나 하는 인식이 한 번 각인되면 돌이키는데 10~20년이 걸린다”고 분석했다. “엉망인 게 ‘그것 하나뿐이겠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낙동강페놀오염사건(1991년)이 벌써 20년도 넘은 일인데, 그 이후 정수기와 생수로 식수문화가 삽시간에 바뀐 뒤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잖아요. 법적, 제도적 장치의 미비에 대한 불신은 그만큼 해소가 쉽지 않습니다.”
안전도 뒷감당도 자급자족, 각자도생
기업과 기술은 물론, 정부도 법도 믿을 게 없는 불신의 토양에서 시민의 선택은 오로지 각자도생이다. 성균관대 SSK위험커뮤니케이션연구단 조사에 따르면, ‘사건, 사고, 재난, 재해 발생 시 관련 정보를 잘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치는 100점 만점에 37.5점이었다. 재난 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치에 정부는 28.1점으로 꼴찌였고, 전문가(37.6점)도 불신했다. 가족(57.1점)이나 자기자신(55.4점)에게만 보통(50점) 이상의 기대를 걸었다. 당연히 ‘당국(정부)의 지침에 잘 따를 것’이라는 답은 46.2점에 머물렀다.
믿을 건 나뿐이니 직접 만들고 키워 쓰고 먹겠다는 사람들이 그래서 나온다. 머리를 감을 때 샴푸를 쓰지 않고 물로만 닦는 노푸족, 천연비누를 직접 만들어 쓰는 이들이 늘고 있고, 살균제 대신 베이킹소다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주부들의 요구에 식용 아닌 청소용 제품이 판매된다. 화학세제 대신 베이킹소다, 구연산, 과탄산소다, 식초 등을 배합해 사용한다는 ‘노케미족’ 전주희(33ㆍ가명)씨는 “사실 사서 쓰는 제품들의 성분분석표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노력도 했었는데, 그게 너무 고단해 차라리 자급자족을 택하기로 했다”며 “이런 수고를 감수하는 것은 한번 피해를 입으면 돌이키기도 어렵고, ‘결국 당해 봐야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자주 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2세와 4세 남매를 둔 주부 박윤경(37ㆍ가명)씨 역시 “모든 화학물질에 대한 불신과 공포 때문에 세제, 로션 등은 임신 직후부터 현재까지 아이들과 함께 천연 재료로 직접 제조한 것이나 협동조합에서 따로 구입한 것만 사용한다”며 “미세먼지 때문에 아무리 더워도 창문을 제대로 열지도 못하는 판국에 아이들 주변에 모기향을 지피는 것도 불안해 밤이면 남편과 돌아가며 불침번 서듯 일어나 전기채로 모기를 쫓느라 지치는 지경”이라고 푸념했다.
오락가락 대책, 불신 키우는 지름길
미세먼지 이슈는 정보 수급에서 대처법까지 시민들의 자급자족 문화가 가장 많이 발달한 분야다. 가정에 값비싼 측정기를 구비하는 것은 기본이고, 매일 아침 지역 커뮤니티 카페에서 서로 측정한 수치를 올려 환기를 시켜도 좋은지, 그 시간은 언제가 적정한지 ‘환타’(환기타임의 줄임말)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 종합 판단하기까지 한다. 유모차에 넣으면 안성맞춤인 휴대용 공기청정기를 만드는 방법도 공유된다.
올 4월 10만원대 가정용 공기측정기를 구입했다는 박윤경씨는 “매일 국내 원인이냐 해외 원인이냐 의견도 분분하고 측정기도 자주 고장난다고 하고 그 측정장소도 제한적인 것 같아 너무나 답답한 마음에 큰 돈을 쓰게 됐다”며 “매일 아침 눈만 뜨면 측정하고, 커뮤니티에서 수치를 비교하고 정보를 얻어 아이들이 외출해도 좋을지 확인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하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동네 마트에서 구입한 휴대용 선풍기와, 자동차 에어컨용 필터, 케이블 타이 등으로 유모차 공기청정기를 직접 만들어 지난 봄 내내 아이들의 유모차 안에 넣어뒀다. 엉성해 보여도 측정기로 확인해 본 결과 유모차 안과 밖의 공기 질이 확연히 달랐다. 날이 더워 유모차 커버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요즘엔 무용지물이어서 속이 탈 뿐이다. “사실 울분이 터지죠. 내가 왜 이걸 다 일일이 검증하고 만들어 대처해야 하는지. 미세먼지뿐 아니라 시장에서 생선 한 마리를 사더라도 불안하고, 창문 여는 것도 그렇고. 대부분 사람들은 이렇게 불안하고 피곤해 하면서도 하는 데까지 해 보자는 사람과, ‘에라 모르겠다’하는 두 부류로 나뉘어요.”
미세먼지는 정보가 명쾌하지 않고 당국이 내놓는 대책도 오락가락하는 것 때문에 불안과 불신을 키운 대표적인 분야다. 대기질통합예보센터와 환경부 등은 한 때 미세먼지 발생의 80%가 중국 요인이라며 한중 협력 대책을 발표했다가, 국내 요인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며 디젤차량 규제로 대책을 선회했다. 하지만 업계 반발로 다시 없던 일로 하는 등 우왕좌왕하고 있다. 환경부와 국립환경과학원이 19일 발표한 미 항공우주국(NASA)과의 합동 조사 결과에선 미세먼지(지난해 5∼6월 서울 올림픽공원 PM2.5 기준)의 국내 요인이 52%, 국외 요인이 48%였다. 황사와 미세먼지는 통계청 ‘2016 사회조사 결과’에서 환경문제 중 가장 국민 불안이 높은 항목(79.4%)이었는 데도 원인조차 채 분석되지 않은 것이다.
최정연씨는 “친절하고 정확한 정보가 없어 이것저것 시도하는 것들인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아줌마들끼리 뭘 하는 거야’라고 취급할 때면 화가 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힘겹게 관련 정보를 찾아 나서고, 정보를 확인한다 한들 취할 수 있는 대처에도 한계가 분명해 답답한 마당에, ‘유언비어’, ‘괴담’ 생성 시도로 치부할 땐 답답하다는 것이다.
과도하게 비과학으로 번지기도
공식 정보에 대한 불신이 크고 자급자족만이 살 길이라는 분위기가 확산되다 보니, 비전문가의 말이나 과학적으로 오류가 명백한 주장을 맹신하는 부작용이 불거지기도 한다. 아토피 아동을 방치하거나, 자연스레 면역력을 높이겠다며 수두파티를 열어 아동학대 비난을 받은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 카페’ 논란이 대표적이다. 카페 운영자 김효진 원장(한의사)은 시민단체의 고발로 경찰 수사를 받게 됐고, 대한한의사협회는 김효진 원장을 윤리위원회에 회부했다. 아이의 건강을 해칠 수도 있는 자연요법들을 무턱대고 따르는 부모들의 무지가 문제였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현대 의학에 대한 불신이 고조된 현실을 반영한다.
김원제 소장은 “국민의 입장에선 삶, 생명에 직결된 문제인 데도 전문가 집단이 밀실에서 결론을 내거나, 메르스 국면처럼 정부가 정보를 은폐하려는 태도를 보이면서 국민은 계몽과 설득의 대상으로만 생각할 경우 국민적 감정은 상할 대로 상하고, 실제 위험보다 더 큰 공포를 느끼는 부작용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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