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의 공주가 틈만 나면 담을 넘고, 홍탁에 닭발을 즐긴다. 오바이트를 하는 건 예사고 만취하면 외박이다. 조선시대 공주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엽기적인 그녀’다. 전지현이 주연한 동명 영화를 안방극장으로 옮긴 ‘엽기적인 그녀’는 조선시대 해명공주(오연서)가 주인공이다. 밑도 끝도 없이 견우(차태현)를 때리고 못살게 굴다가도, 멀리서 그를 보며 눈물을 훌쩍이던 엽기적인 그녀(전지현)가 공주가 되어 나타난 셈이다. ‘예측불허’ ‘상상초월’이라는 수식어의 해명공주 역을 맛깔스럽게 소화한 배우 오연서(30)를 25일 서울 역삼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오연서는 “늘 망가지는 역할을 한 것 같다”고 했다. 막장 드라마였지만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MBC 드라마 ‘왔다 장보리’도 빠글빠글한 퍼머 헤어스타일에 사투리를 쓰는 연기를 했고, SBS 드라마 ‘돌아와요 아저씨’도 영혼이 바뀌어 여자가 된 남자 역할이었다. 좋게 말해 개성 있는 캐릭터지, 예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털털한 이미지가 구축된 게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그는 ‘엽기적인 그녀’ 첫 회부터 심상치 않은 연기를 해야 했다.
견우(주원)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오바이트를 하고 견우를 “변태 색정광”이라며 오해 아닌 오해도 한다. 반말에 욕설도 툭툭 내뱉는 연기가 수준급이다. 오글거리게 할 설정이었지만 오연서이기에 별탈 없이 연기했다.
하지만 주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그의 엄마는 “토하는 걸 꼭 저렇게 찍어야 했니?”라며 속상해했다고. 이 장면은 컴퓨터그래픽(CG)이 더해져 더 사실적으로 표현됐기 때문이다.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는 공주를 그리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오연서에게 “반말 대사”는 가장 난감하면서도 힘든 작업이었다. “낯선”게 가장 컸다. ‘빛나거나 미치거나’ ‘동이’ ‘거상 김만덕’ ‘대왕세종’ 등 사극에 출연한 경험이 있는 그에겐 오히려 반말투의 대사가 어색했다. 그는 “말투가 너무 현대적이어서 ‘제대로 하고 있는 것 맞나’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많았다”고 했다. 사전제작 드라마라 시청자의 평가를 반영할 수 없으니 더 그랬다. 상대 역인 주원이나 제작진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연기의 완급조절”을 했다. 현대극도 아닌 사극에서 반말을 쓰는 왈가닥 캐릭터는 과장되게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완급조절이 필요했다. 동갑내기 주원이 가장 많은 도움을 줬다.
“평소에 친구들에게서 주원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동갑인데다 예술고를 나오고 대학에서도 연극영화 전공이라 주변에 아는 친구들이 많아요. 그래서인지 금방 친해졌고 편해졌죠. 사전제작이라 ‘잘 하고 있는 건가’하고 서로 고민을 많이 했고 의지도 많이 했어요.”
주원과의 호흡은 드라마에 그대로 드러났다. “쟤 왜 저래?”하며 앞뒤 가리지 않는 해명공주와 자존심이 강한 견우가 티격태격하며 정을 쌓아가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극 초반 코미디 장르처럼 웃음을 선사한 찰떡궁합은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가 만든 선물이었다.
뒤로 갈수록 친밀한 관계는 ‘독’이 되기도 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해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에선 “서로 보기만 해도 웃겨서 첫 키스 장면이 힘들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최근 군에 입대한 주원을 위해 ‘엽기적인 그녀’를 연출한 오진석 PD와 면회도 갈 계획이다. 7개월의 촬영 기간이 친밀도를 더욱 높여준 듯 보였다.
친구가 있었지만 해결 못한 문제는 의외로 먹는 것이었다. 닭발을 즐기는 해명공주 캐릭터는 오연서와 맞아떨어졌다. 매운 음식을 좋아해서 닭발을 자주 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어는 목에 넘기기가 힘들었다. “음식에서 날 수 있는 냄새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촬영할 때 실제로는 “광어회를 먹었다”고 고백했다. 홍어 맛을 모르니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현장에서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연구했다. 한 장면도 허투루 넘기지 않으려는 욕심이었다. 그의 이런 노력은 시청률로 이어졌다. 20~30%대의 높은 수치는 아니었지만 10% 내외를 꾸준히 기록했다. 고정 시청층을 형성하며 나름의 성과를 올린 셈이다.
걸그룹 러브로 데뷔해 배우로서 10여년의 시간을 보낸 오연서는 큰 기복 없이 꾸준하고 성실하게 연예계 활동을 해왔다. 신인 때부터 ‘연기력 논란’에 휘말린 적이 없다. 배우로서 축복이라면 축복이다. 그 비결이 뭘까.
“현장에서 연기가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스타일이에요. 부족한 게 많기 때문이죠. 저는 아직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하는 입장이에요. 작품 속에서 상대 배우나 편집기술, 혹은 배경음악 등의 도움이 필요하죠. 저 자신에게 실망하기는 죽기보다 싫거든요.”
‘악바리’ 근성이 오연서의 버팀목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성격이 드라마에도 스며들어 진정성 있는 캐릭터가 완성되는 건지도. 그는 개봉을 앞둔 영화 ‘치즈인더트랩’에서도 강단 있고 발랄한 분위기의 홍설 역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
“모든 작품이 제겐 도전이었어요. 앞으로도 다르지 않죠. 다만 그간 명랑한 이미지로 대중을 만났다면 다음에는 정반대의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정통 멜로나 액션 등 장르물을 해보질 않았는데 꼭 해보고 싶어요.”
매년 한 편씩은 꼭 출연해온 그는 몇 달간 휴식을 취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지난 2년 간 가지 못했던 아이돌그룹 엑소의 콘서트를 다녀온 일이다. 최근 엑소 콘서트를 보며 스트레스를 확 풀었단다. 특히 엑소의 멤버 “카이의 팬”이라고 귀띔했다. 2002년 열 다섯 살에 걸그룹 멤버로 데뷔했던 오연서는 가수들의 콘서트를 보면 “어떻게 저렇게 멋지게 춤을 출까?”하고 감탄할 때가 더 많단다. 가수 활동할 때 제일 싫었던 게 “연습실에서 춤 연습하는 것”이라고 할 정도니까.
“너무 어린 나이에 데뷔를 해서 후회되는 게 많더라고요.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연기를 하든 가수를 하든 철 좀 들고 늦게 데뷔하고 싶어요. 연예인의 보이지 않는 뒷면을 너무 몰랐어요. 가수를 다시 하고 싶느냐고요? (손을 가로저으며)아뇨! 가수를 할 일은 없을 거예요.”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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