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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었지만 당당했던 삶…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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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었지만 당당했던 삶…편히 쉬세요”

입력
2017.07.2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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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 故김군자 할머니 영면

25일 오전 경기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 노제에서 참석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광주(경기)=연합뉴스
25일 오전 경기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 노제에서 참석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광주(경기)=연합뉴스

꽃다운 청춘을 송두리째 빼앗은 일본 제국주의에 ‘용감한 증언자’로 당당히 맞서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군자 할머니(향년 91세)의 영결식이 25일 엄수됐다.

고인의 영결식은 성남시 분당차병원 장례식장에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불교식 발인제를 시작으로, 고인이 머문 ‘나눔의 집’으로 이동해 노제를 지내는 순서로 진행됐다.

노제에는 더불어민주당 소병훈ㆍ임종성 의원, 강득구 경기도 연정부지사, 박종문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유족과 지인, 학생 등 각계 인사 10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나눔의 집 원행 스님은 추모사에서 “올바른 역사와 인권을 알리기 위해 당당하고 용감하게 증언을 한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여성인권 활동가로 기억하겠다”고 넋을 기렸다.

이용수(90) 할머니는 “군자씨. 우리는 왜 이렇게 당하고 울어야 하나. 아니다. 우리는 당당하다”며 “밤에 끌려가 이리저리 다니며 위안부가 됐지만, 우리는 위안부가 아니다. 김군자, 이용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 할머니는 “우리를 강제로 위안부로 만든 일본은 반드시 공식사죄하고 법적 배상을 해야 한다”며 “우리는 당당한 여성으로 예쁘게 자란 죄 밖에 없다”고도 했다. 그는 “나쁜 대통령이 우리를 팔아 먹었다”며 “윤병세가 어디다 도장을 찍었나”라고 전 정권에 대한 원망도 쏟아냈다.

1시간여 이어진 노제가 끝나고 고인은 나눔의 집 생활관을 둘러보며 함께 생활해온 할머니 9명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 모든 장례절차를 마친 고인의 유해는 서울 양재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된 뒤 나눔의 집 법당에 안치됐다.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10대에 부모를 여의고 친척 집에서 생활하다가 16살의 나이로 중국 지린성 훈춘 위안소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했다. 3년간의 위안부 생활 동안 7차례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홀로 살던 김 할머니는 1998년부터 지난 23일 눈을 감을 때까지 20여 년간 나눔의 집에서 생활했다. 고인은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배상금 등을 모아 아름다운재단에 1억원, 퇴촌성당에 1억5,000만원, 나눔의 집에 1,000만원 등 생전에 모은 돈 2억6,000여만원을 다 기부하고 떠났다.

김 할머니의 사망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37명으로 줄었다.

유명식기자 gij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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