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독자가 책 구매 주도… 동성 작가 선호하는 탓
‘커러, 엘리스, 액턴 벨의 시집ㆍPoems by Currer, Ellis, and Acton Bell’. 1846년 나온 시집이다. 영문학에 얼마간의 관심만 있다면, 샬럿(대표작ㆍ폭풍의 언덕)ㆍ에밀리(제인 에어)ㆍ앤 브론테 3자매가 남성 필명(筆名)으로 발표한 작품이란 사실을 알 것이다. 당시로서는 문학적 소양이나 지적 능력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미국과 영국에서도 유능한 여성 작가가 남자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사례가 흔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2일(현지시간) 이제 미국 문단에서는 남녀 역전 현상이 발생, 더 많은 인기와 책이 팔리기를 기대하며 여성 필명을 내세우는 남성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최근 2, 3년간 인기를 얻은 소설 중 일반 독자들이 여성 작품으로 짐작했던 것 중 상당수가 나중에 중년 남성의 저작으로 확인됐다. 2015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얼음 쌍둥이ㆍThe Ice Twins’가 대표적이다. 여성 주인공이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내용을 이끌어갔기 때문에 누구나 작가(S.K. 트레메인)가 여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박을 친 뒤 확인된 정체는 중년의 영국 남성작가, 숀 토머스(53)였다. 원래 ‘톰 녹스(Tom Knox)’라는 필명을 사용했으나 ‘책을 더 팔려면 작가 이름을 바꾸는 게 좋겠다’는 출판사의 요구로 필명까지 바꾼 것이다.
이미 오래전 성 정체성이 공개됐는데도, 여성 이름으로 작품을 내는 작가도 많다. 올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내 앞의 여자ㆍThe Girl Before’를 지은 ‘JP 델라니’도 실제로는 토니 스트롱이라는 남성이다. 토니 스트롱은 “여성이라고 속이지는 않지만, 독자들이 내 책을 읽은 뒤 ‘JP 델라니’를 여성 작가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일부는 단순히 필명만 바꾸는 수준을 넘어선다. 여성들만의 경험과 감수성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 과감히 노력한다. ‘S.J. 왓슨’이란 필명으로 활동하는 스티브 왓슨은 베스트셀러 ‘내가 잠들기 전ㆍBefore I Go to Sleep’을 쓰는 동안 브래지어를 착용했다. 덕분에 작품에서 일곱 군데나 등장하는 여성 속옷과 관련된 묘사가 극히 사실적일 수 있었다고 한다.
남성 작가들의 이러한 ‘성전환’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 책 시장 주도권이 여성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WSJ에 따르면 2016년 미국에서 팔린 소설책의 59%를 여성이 구매했다. 거의 6대 4 구도로 여성이 남성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여성 독자는 남성과 달리 여성 작가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남녀별로 각각 2만명의 선호 작품을 조사한 결과, 여성 독자들이 꼽은 50대 우수작 중 46개가 여성 작가의 결과물이다. 이 신문은 돈과 인기를 위해 작품세계에서는 정체를 감추고 여성 행세를 하는 작가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워싱턴=조철환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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