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다 외국에서 오래 있다 와서 처음 음악을 접할 때 너무 어려운 거예요.”
국립현대무용단이 오는 28~30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올리는 ‘제전악-장미의 잔상’. 안성수 예술감독이 부임 후 첫 선을 보이는 신작이다. 현대무용은 분명한데 현대라는 수식이 좀 낯설다. 현대라고 하면 서양음악이 배경을 채워야 하는데, 음악은 오롯이 우리나라 전통악기로 이루어졌다. 장구 장단에 대금과 가야금이 어우러진다.
지난 1월 국립현대무용단 시즌 단원으로 선발돼 이번 공연에 나서는 현대무용수 최수진(32) 성창용(34)은 이 음악 자체가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성창용은 “서양음악, 클래식 음악에 맞춘 춤을 많이 춰서 국악 장단에 맞춰 박자를 세는 게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최수진은 “정확히 듣고 군무도 맞춰야 해서 박자 한 번 놓치면 끝”이라며 “무대 뒤로 가면 호흡을 가라앉히기 위해 거의 누워있다”며 웃었다.
하지만 두 무용수의 춤 사위는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두 사람은 무대 위에서 주로 듀엣을 선보인다. 공연을 앞둔 이들을 최근 예술의전당 내 무용단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스무살 때부터 봐온 동료, 호흡 척척
한국적인 장단에 맞추는 게 어렵다고 했지만 이들은 이미 국내외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무용수다. 최수진은 미국 뉴욕의 현대무용단 시더 레이크 컨템포러리 발레단의 최초이자 유일한 한국인 단원으로 4년간 활동했다. 서울예고에서 발레를 전공하던 최수진은 3학년 때 현대무용으로 전환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했다. 졸업과 동시에 뉴욕 앨빈 에일리 학교의 장학생으로 선발됐고, 이어 3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시더 레이크 발레단의 단원이 됐다. 2014년 Mnet의 춤 경연 프로그램인 ‘댄싱9’에 출연하면서 그의 이름은 국내에 더욱 알려졌다. 당시 벨기에 피핑톰 무용단의 김설진과 MVP를 놓고 경쟁해 ‘갓수진’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성창용도 한예종과 앨빈 에일리 학교를 졸업했다. 최수진보다 2년 선배다. 중학생 때 비보이로 춤을 시작한 그는 한예종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뒤 미국으로 건너갔다. 앨빈 에일리 학교에서 공부한 뒤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 단원으로 3년, 1981년 창단된 모믹스 무용단 단원으로 또 다시 3년여 동안 활동했다. 최수진과 성창용은 제4회, 제6회 서울국제무용콩쿠르에서 각각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듀엣 무대에서 성창용이 최수진을 지탱하는 동작이 유난히 많다. 최수진은 몸에 힘을 빼고 성창용에게 기대 동작을 이어나간다. 두 사람은 이를 “고목나무에 툭 걸치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안성수 감독은 듀엣 안무를 ‘서동요’에서 착안했다고 밝혔다. ‘서동요’ 속 사랑 이야기를 모티프로 했지만 두 무용수에게 감정적인 교감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왕자, 공주 이야기의 느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공간을 이야기하는 느낌이라고 하셨어요. 서로의 에너지만을 주고 받는 느낌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저희끼리 눈을 맞추는 부분도 거의 없어요.”(최수진) 성창용 역시 “감정을 티 나게 드러내지 않는 게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이었다”며 “감정은 배제하고 움직임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한 두 해 얼굴을 봐 온 사이가 아니지만 공연에서 호흡을 제대로 맞춰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도 눈빛만 봐도 호흡이 척척 맞는단다. “듀엣을 하면 남자 무용수들은 주로 여자 무용수를 지탱하거나 들어올리는 동작이 많아요. 학교 선후배기도 하고 오래 보고 지내서 눈빛이나 한 번 붙잡기만 해도 바로 의견을 알아차릴 수 있어요.”(성창용) 최수진은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저는 상대방이 어떻게 해주느냐에 따라서 제 춤의 질이 달라져요. 잘 잡아주면 잘할 수 있고 못 잡아주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못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긴장도 많이 되는데 파트너가 제 요구를 잘 들어줘서 고맙지요.”
“한국의 현대무용 진수 보여줄 것”
‘제전악-장미의 잔상’의 음악은 이 작품 만을 위해 작곡된 춤곡이다. 한예종 출신의 라예송(32) 작곡가가 안성수 감독의 의뢰를 받고, 15개 이상의 국악기로만 구성해 작곡했다. 안성수 감독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서 영감을 받고 만들었던 전작 ‘장미’(2009)에서 다시 한번 음악적 영감을 얻었다. 그래서 제목도 ‘장미의 잔상’이다. 음악뿐 아니라 안무에도 한국무용이 접목됐다. 이미 ‘장미’와 ‘혼합’(2016)에서 한국무용과 서양무용을 구분하지 않고 해체하고 조립해 왔던 안 감독의 뜻이 반영돼 있다. ‘서동요’부터 뉴질랜드 마오리족 전사들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추는 하카, 스페인의 플라멩코에 이르는 춤들이 녹아 들었다. 발레 움직임 같은 안무 뒤엔 한국무용수들의 오고무가 이어진다.
이번 공연의 키워드는 ‘혼합’이다. 무대에는 최수진, 성창용뿐 아니라 이번 시즌 무용수 15명이 모두 오른다. 무용수들은 발레와 한국무용 수업을 함께 들으며 호흡을 맞춰왔다. 최수진은 “처음엔 한국무용수랑 같이 한다고 해서 우리 움직임의 차이를 좁힐 수 있을지 의아했지만 지금은 어색하지 않다”며 “한국무용의 선이 더 좋은 부분은 그 움직임을 따라가고, 현대무용이 더 낫다 싶은 부분은 살리면서 맞춰가고 있다”고 말했다.
최수진과 성창용은 이번 작품과 안성수 감독에 대한 강한 믿음을 보였다. 최수진은 “웬만한 현대무용은 외국 친구들에게 전혀 새롭지 않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굉장히 놀랄 만한, 독보적인 독창성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성창용은 대학 때 안 감독의 창작 수업을 듣고 사랑에 빠졌다. “졸업 후에도 워크숍이나 강의를 꼭 들으러 다녔다. 지금이 아니면 감독님과 함께 작업을 해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한국에 들어온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최수진은 “모던 발레 작품 안무에 몇 년 안에 도전할 것”이라며 “안무가 겸 무용수로서 한국에서 활발히 활동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반면 성창용은 안성수 감독과 작업이 끝난 후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나이가 많은 것 같다”며 국내 방송 출연을 마다하는 성창용에게 최수진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다 무대라고 생각하고 하면 되지 뭐.”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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