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 가기로 했다. 몽골이,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울란바토르에 있는 오아시스 게스트하우스가 꼭 노아의 방주 같았다. 이 재앙에서 날 지켜줄 곳이라고 여겼다.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홍수가 들이닥쳐도 그곳에만 가면 다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이름부터 오아시스 아닌가.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에 가면 안식을 취할 수 있으리라.
난 명백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하바롭스크에서 울란우데까지 눈물, 콧물 쏟으며 지나왔다. 극동을 관통한 대가는 꽤 컸다. 모터사이클은 여전히 경고등으로 날 위협했다. 그 사이 노숙하며 하루 꼬박 1000킬로미터를 달린 때도 있었다. 게다가 진흙탕에서 두 번, 개에 쫓겨 한 번 모터사이클과 바닥에 나뒹굴었다. 극동 러시아는 어감처럼 날 극한으로 밀어붙였다. 하바롭스크-치타 구간은 소문대로 만만치 않았다.
나를 돌아봤다. 동해항에서 배를 타던 내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모터사이클 역시 마찬가지였다. 출발할 때 시동이 꺼지고, 때론 주행 중에도 시동이 꺼졌다. 킥 스타터로 낑낑거리며 다시 시동 걸어 출발해야 했다. 굴러간다는 게 고마우면서도 께름칙했다. 언제 엔진이 멈출지 몰라 두려웠으니까. 러시아 도로 벌판에서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건 생각보다 운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가기 전에는 그것도 여행의 재미일 거라 생각했다. 가보니, 살벌했다.
몽골을 방주로 여긴 건 이유가 있었다. 울란바토르 오아시스게스트하우스엔 일본인 정비사가 일한다. 몽골인 부인을 얻으며 눌러 산 경우였다. 내 모터사이클은 야마하 SR400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일본인 정비사라면 문제를 해결할 거란 믿음이 있었다. 물론 막연한 기대였다. 사람은 언제나 궁지에 몰리면 스스로 빠져나갈 최면을 건다. 내겐 일본인 정비사가 그랬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한국에서 몽골로 보급부대가 오는 까닭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일정을 조율했다. 유라시아 횡단 중간, 몽골에서 만나 회포를 풀자고 했다. 육로로 달려가 비행기로 온 사람들을 만나는 신선한 경험. 보급부대로 명명한 만큼 모터사이클 부품과 몇몇 생필품을 가져다주기로 했다. 사실 물건을 보급받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이 컸다. 그동안 난, 철저히 고독했다. 몇몇 바이커 클럽에서 사람들을 만났지만, 조금 다른 문제였다. 한국사람, 그동안 쌓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철저히 타자에서 ‘우리’가 될 수 있었다.
오아시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다양한 국적의 오버랜더(대륙 간 여행자들)들이 북적거렸다. 모터사이클 여행자는 물론, 캠핑카로 전 세계를 도는 가족도 수두룩했다. 몽골이라는 척박한 땅을 ‘모험’하는 사람들만의 유대감이 형성됐다. 스스럼없이 인사하고 정보를 교환했다. 호주에서 출발해 동남아를 돌고 몽골에 들어온 영국인, 유럽에서 출발해 중앙아시아까지 돌고 몽골에 들어온 이탈리아인,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몽골을 횡단해 마가단까지 가는 러시아인 등등. 게르 앞에 전시하듯 세워놓은 다채로운 듀얼 퍼포우즈 모터사이클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과거 몽골 제국에서 말 경연장이 이랬을까.
그들의 모터사이클을 보며 야마하 SR400을 선택한 내가 무지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한국 도심에선 거추장스럽게만 보이던 덩치 큰 모터사이클들이 이곳 풍광에는 더없이 녹아 들었다. SR400으로 가기로 너무 쉽게 결정했다고, 유라시아 횡단 초기 구간을 달리며 수 차례 자책했다. 도구를 잘못 선택한 셈이다. 마치 과도로 회를 뜨려고 했달까? 감성으로 타는 모터사이클은 확실히 시내 주행용이었다.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난 4000㎞를 달려왔으니까.
내 SR400을 일본인 정비사 코지에게 맡겼다. 신의 은혜를 바라는 신자의 마음으로 코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 사이 SR400 정비 매뉴얼도 받아서 넘겼다. 이미 하바롭스크에서 흡기압 센서를 교체했기에 원인은 더욱 오리무중이었다. 코지는 역시 신이 아니었다. 컴퓨터가 제어하는 인젝션 모터사이클은 그도 온전히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다. 제대로 파악하려면 컴퓨터 즉, 오류 진단기가 있어야 했다. 그런 게 몽골에 있을 리 있나. 코지에게 하드웨어적으로 해볼 수 있는 정비를 다 해보라고 맡겼다. 제발, 마음 편히 달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몽골 보급부대가 도착했다. 시간 맞춰, 아니 1시간이나 일찍 그들이 예약한 호텔 앞에서 기다렸다. 좋아하는 여자도 이렇게 기다리진 않을 거다. 하지만 기다리고 싶었다. 그들이 오면 난 울려나. 빛 한 조각 없는 진흙탕 길에서 모터사이클과 뒹굴었을 때도 눈물 흘리지 않았는데, 설마. 드디어 그들이 택시 타고 도착했다. 역시 울진 않았다. 도리어 서울 어디쯤에서 만난 듯 자연스러웠다.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지금까지 느끼던 낯선 기분이 휘발되는 편안함이었다.
삼겹살을 먹자고 했다. 다른 건 후보에 두지 않았다. 이상하게 삼겹살과 소주가 먹고 싶었다. 혼자 삼겹살과 소주를, 외국에서 먹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울란바토르에는 한국식당이 꽤 많다. 보급부대가 묵는 호텔 근처에도 있다. 자리에 앉자마자 볼 것 없이 삼겹살을 시켰다. 그러고 소주를 호기롭게 시켰다. 하지만 삼겹살만 나왔다. 대통령 선거일이라 술을 안 판단다. 그러고 보니 전날 마트에서도 술을 팔지 않았다. 맑은 정신으로 대통령을 뽑으라는 몽골의 제도일까? 밋밋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삼겹살만 먹었다. 다들 투덜거렸지만, 난 삼겹살만 먹어도 행복했다. 역시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비록 모터사이클에 문제가 생겼어도, 고난의 극동 구간을 달렸어도, 삼겹살을 먹으니 행복했다. 삼겹살만으로 보급부대는 제 몫을 했다.
보급부대와 테를지 국립공원에 가기로 했다. 내 SR400은 코지의 정비소에 있으니 다른 모터사이클을 빌려야 했다. 모터사이클 두 대와 차 한 대를 빌렸다. 혼다 아프리카 트윈(물론 신형이 아니다)과 스즈키 DR650, 그리고 20년은 족히 넘었을 듯한 미쓰비시 파제로 한 대. 한 달 동안 타온 SR400을 놓고 다른 모터사이클을 타는 게 낯설긴 했다. 하지만 이것도 횡단의 이벤트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SR400에 쌓인 불만을 해소하는 외도랄까.
테를지 국립공원은 몽골 북부의 비옥한(?) 모습을 잘 보여줬다. 초원 위쪽으로 나무도 보였다. 그 풍광이 풍요로웠다. 테를지 메인 도로 옆으로 오프로드 길이 뻗어 있었다. 오프로드 길은 길이라기보다 자동차가 많이 지나가면 절로 생긴 표식 정도였다. 모터사이클을 타다가 그냥 초원으로 들어가도 무방했다. 오히려 초원으로 달리는 게 더 편할 때도 있었다. 목적지는 국립공원 내 게르 캠프. 테를지에는 여러 캠프가 조성돼 있다. 우리가 간 곳은 한국인이 자주 온다는, 그래서 샤워장과 화장실이 괜찮은 바양하드 캠프였다.
캠프라고 해서 대단할 건 없었다. 푸른 초원에 덩그러니 하얀색 게르 몇 채가 놓인 게 캠프의 전부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 자연 속에 어우러지면서 묘한 해방감을 줬다. (황토색이 많이 섞였지만) 초록 일색인 대지와 하늘을 활기차게 노니는 구름 조합만으로도 매순간 풍요로웠다. 도시생활과는 성분이 다른 즐거움으로 충만했다. 그냥 바라만 봐도 좋은데, 그 공간을 모터사이클 타고 누비기까지 하니 즐겁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함께하니 더욱.
아프리카 트윈과 DR650은 처음 타보는 모터사이클이었다. 둘 다 시트고가 만만치 않았다. 높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초보 라이더인 내겐 진땀 흘릴 이유로 충분했다. 게다가 아프리카 트윈은 무겁기까지 했다. 높이와 무게가 이중고로 괴롭혔다. 물론 출발만 하면 그 높이와 무게가 더 안락하게 달리게 했지만. 듀얼 퍼포즈 장르 모터사이클을 타보니 역시 SR400을 횡단용으로 선택한 건 만용이었다. 내 SR400이 상태까지 나쁘니 더욱 회의감이 쌓였다.
걱정은 뒤로 넘기고 테를지 국립공원을 이곳저곳 쏘다녔다. 파제로와 아프리카 트윈, DR650을 번갈아 가며 타니 호사스러웠다. 이것도 다 보급부대와 함께하기에 누리는 사치 아니겠나. 그들이 떠나면 다시 혼자겠지만, 걱정은 내일로 미루는 게 속 편했다. 지금은 삼겹살(무려 캠프에서 주문할 수 있다)과 칭기스칸 보드카를 마시며 유라시아 횡단 중에 만난 오아시스를 즐길 뿐이었다. 무려 밤에 자작 캠프파이어까지 누리면서.
보급부대와 함께 보낸 몽골의 나날은 줄곧 행복했다. 비록 울란바토르로 돌아갈 때 DR650 앞바퀴에 철조망 조각이 꽂혀 펑크가 나긴 했지만. 튜브를 때우려고 낑낑거리다 결국 용달을 불러 싣고 돌아온 슬픈 일화로 마무리했다. 그럼에도 괜찮았다. 고비사막 한복판에서 펑크 난 건 아니니까. 유라시아 횡단을 하다 보니, 어떻게든 해결하면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됐다. 보급부대와 즐긴 시간에 비하면 이 정도 고난은 양념일 뿐이었다.
보급부대를 환송했다. 하룻밤 꿈을 꾼 듯했다. 이젠 다시 혼자가 됐다. 여전히 SR400은 출발할 때 종종 시동이 꺼졌다. 아직 갈 길도 까마득했다. 난 가긴 갈 수 있을까. (다음 편에 계속)
글 김종훈(자유기고가/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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