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샤오룽(李小龍, 미국명 브루스 리, 1940~1973)이 배우로 이름을 날린 건 첫 주연 영화 ‘당산대형’(1971, 영어 제목은 The Big Boss)부터다. 31세의 그는 태국 마약 밀수조직을 상대로 자신이 창안한 실전격투 무예인 절권도(截拳道)를 선뵈며 일약 세계적 스타로 부상했다. 맨주먹과 곡예 같은 발차기로 범죄조직원들의 총과 칼을 단숨에 제압하는 그의 무술은 당시 할리우드 영화가 경험하지 못한 액션이었다.
이듬해 약 10만 달러를 들여 제작된 영화 ‘정무문(Fist of Fury)’은 미국서만 340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극장 앞에 인파가 너무 몰려 경찰이 출입을 통제해야 했을 정도였다. 쌍절곤이 처음 등장한 게 정무문이었다. 주먹만으로도 당할 자가 없을 것 같던 그였다. 쌍절곤을 든 리샤오룽은 말 그대로 지존(至尊)이었다. 정무문 끝 장면에 무명배우 청룽(成龍, 1954~)이 악역으로 등장, 그와 인연을 맺고 배우로 빨리 자리를 잡게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라테의 강자 척 노리스를 등장시킨 ‘맹룡과강(72)’과 마지막 영화 ‘용쟁호투(73)’까지 그는 네 편의 장편 극영화를 찍었다. 73년 작 ‘사망유희’는 그가 미리 촬영한 약 10분을 빼면 대역을 썼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그는 경극 배우였던 아버지 영향으로 아역배우로 성장했다. 7살 무렵부터 태극권을 익히기 시작했고, 10대 때부터 입만(葉問)의 영춘권을 사사했다고 한다. 이미 싸움꾼으로 ‘악명’ 높던 그가 복싱, 레슬링 펜싱 등 온갖 운동을 섭렵한 건, 현실적인 필요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이름(본명 振藩)을 걸고 도장을 차리기도 했지만, 그의 꿈은 배우가 되는 거였다. 61년 워싱턴대 연극과에 진학했고, 60년대 내내 영화와 TV시리즈 조연과 단역으로 힘겨운 무명 시절을 보냈다. 얼마간 실의에 젖어 홍콩으로 건너갔다가 찍게 된 ‘당산대형’으로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서구 70년대의 대안문화운동과 동양 열풍이 겹쳐 그는 배우를 넘어 시대의 우상이자 문화 아이콘이 됐다. 생애 가장 화려했을 그 어느 날(73년 7월 20일) 그는 진통제 쇼크로 별세, 신화가 됐다. 70년대 10대 남자 아이가 있는 한국의 가정에도 쌍절곤 없는 집이 드물었다. 그 많은 쌍절곤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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