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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부터 삼계탕까지… 배지의 변신

입력
2017.07.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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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참고 다녀야 하는 현실에서 배지로나마 위안을 삼고 있어요.”

직장인 임언희(36)씨는 얼마 전 ‘퇴사’ 배지(Badge)를 구입했다. ‘퇴사!!’라는 글자가 폭발하는 듯한 디자인이 자신의 바람을 그대로 담은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드라마 작가를 꿈꾸는 임씨는 기숙사에 모셔둔 배지를 바라보며 당당하게 회사를 떠나는 상상을 한다. “틈틈이 방송국 공모전에 도전하고 있지만 쉽지 않네요. 언젠가 퇴사를 한다면 제 꿈이 이루어진 것이겠죠.”

단체 또는 직장 등 소속을 표시하거나 기념의 수단이었던 배지가 달라지고 있다. 사적인 취향부터 현실에 대한 저항과 일탈, 사회적 메시지 전달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배지의 세계를 들여다 봤다.

현실적 제약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소망을 배지에 담았다. Hot_bbang(트위터)
현실적 제약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소망을 배지에 담았다. Hot_bbang(트위터)
암울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며 자조하는 배지들. tejell(트위터), 귤자
암울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며 자조하는 배지들. tejell(트위터), 귤자
참견, 간섭을 거부하는 배지. baggymind(인스타그램)
참견, 간섭을 거부하는 배지. baggymind(인스타그램)

# 암울한 현실의 역설적 위로

적성은 무시한 채 성적과 학교 이름만 따져 진학한 대학생활에 회의를 느낀 손모(21)씨는 가방에 ‘자퇴’ 배지를 달았다. “자퇴하고 싶다”는 말을 습관처럼 되뇌면서도 막상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용기를 못 내는 손씨에게 ‘자퇴’ 배지는 상상 일탈이자 역설적 위로다. ‘자퇴’ ‘퇴사’ ‘휴학’ ‘퇴근’ 배지를 만든 김모(24)씨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것들을 배지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절망적인 단어로 위안을 주는 배지는 또 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막막했던 박해영(26)씨는 ‘좌절하지 말자’는 의미로 ‘멸망’ 배지를 만들었다. 그는 “불안한 상황에 놓인 젊은이들이 ‘멸망’ 배지를 보며 즐겁게 속풀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지를 구매한 박형원(33)씨는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자조적 응원 같다. ’모두 멸망했으면 좋겠다’고 저주할 만큼 세상이 더 나빠지면 안 되니까”라고 말했다.

세월호와 위안부 기억 배지. so0_an(인스타그램)
세월호와 위안부 기억 배지. so0_an(인스타그램)
유기동물 보호 메시지를 담은 배지. oee0(인스타그램)
유기동물 보호 메시지를 담은 배지. oee0(인스타그램)
뉴질랜드가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부여한 해인 1893년을 새긴 배지. 성 차별을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뉴질랜드가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부여한 해인 1893년을 새긴 배지. 성 차별을 반대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미세먼지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하는 배지. nuribom2017(인스타그램)
미세먼지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하는 배지. nuribom2017(인스타그램)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배지가 달린 금혜지씨의 가방. 그는 '걸어 다니는 경종'이라 불린다. 금혜지씨 제공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배지가 달린 금혜지씨의 가방. 그는 '걸어 다니는 경종'이라 불린다. 금혜지씨 제공

# 배지, 사회에 경종을 울리다

금혜지(25)씨는 친구들 사이에서 ‘걸어 다니는 경종’ 또는 ‘프로 경종러’로 불린다. 세월호 리본이 달린 천 가방에 성 차별 반대, 유기견 문제, 환경 보호 등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배지를 달고 다니기 때문이다. 금씨는 “내 정체성과 신념, 연대의식을 반짝이고 예쁜 것들로 기록하고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배지는 세월호 참사 이후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반대하는 배지를 비롯해 세계 최초로 여성이 투표권을 취득한 해를 강조한 ‘1893 페미니즘’ 배지, 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배지 등이 SNS상에서 공동구매 형태로 유통되고 있다.

복날을 앞두고 나온 삼계탕 배지. studio831b(트위터)
복날을 앞두고 나온 삼계탕 배지. studio831b(트위터)
시지빵, 평양냉면, 초밥 등 음식을 앙증맞게 표현한 배지들. weeweej(트위터), on.jeon(인스타그램), hm10000m(인스타그램)
시지빵, 평양냉면, 초밥 등 음식을 앙증맞게 표현한 배지들. weeweej(트위터), on.jeon(인스타그램), hm10000m(인스타그램)
영화 쇼콜라, 캐롤, 다크나이트, 빌리엘리어트 장면이나 주인공의 모습을 담은 배지. 소시민워크 제공
영화 쇼콜라, 캐롤, 다크나이트, 빌리엘리어트 장면이나 주인공의 모습을 담은 배지. 소시민워크 제공

# 취향 저격 배지

거창한 메시지 대신 빵이나 초밥, 삼계탕 등 음식 배지도 인기다. ‘낙엽 소시지 빵’ 배지를 가방에 단 이보슬(31)씨는 “좋아하는 음식을 귀엽게 표현한 배지를 보면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가격이 저렴해서 ‘시발비용(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쓰지 않았을 돈)’으로도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초복인 지난 12일엔 ‘삼계탕’ 배지도 등장했다. 제작자 연은정(25)씨는 “복날에 지인들에게 선물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삼계탕 사준다고 불러내 배지를 주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즐겁지 않나”고 말했다.

개인의 취향을 배지로 표현하는 방식은 영화 배지에서도 나타난다. 포스터와 달리 배지는 디자인과 주물, 채색 등의 단계를 거치면서 새로운 매체로 탄생한다. 영화에 담긴 메시지를 새로운 방식으로 함축할 수 있다는 점도 영화 배지가 지닌 매력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세월호나 위안부 배지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젊은층의 관심과 입장을 표현하는 매개로서 각광받았다면 최근엔 사적이고 하찮아 보이는 일상적 소재를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고 공감을 이끌어 내는 배지가 주목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 확산하는 배지 문화

“에코백에 한두 개씩 다는데, 가끔 바꿔 달면 기분전환이 돼요.” 이보슬(31)씨는 동물과 음식 배지 등 30가지 이상의 배지를 소장하고 있다. 남선우(25)씨는 배지를 청 재킷에 달아 포인트를 준다. 얼마 전 자신이 좋아하는 초밥을 배지로 만든 최빛그림(25)씨는 취미로 배지를 수집하다 제작자가 된 경우다.

사회적 의사 표현의 수단이나 개인 소장품 또는 패션 아이템으로서 배지가 각광을 받고 있다. 배지 제작은 주로 온라인 플랫폼과 SNS에서 이루어지는데, 제작자가 배지 도안을 게시하면 디자인이나 메시지에 따라 관심 있는 이들이 공동구매를 신청하는 방식이다. 일정 수량 이상 구매가 확정되면 공업사 5~6곳의 수작업을 거쳐 배지가 완성된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배지 다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거래량도 늘고 있다. 창작 후원 온라인 플랫폼 ‘텀블벅’ 관계자는 “소규모 스튜디오나 개인 창작자 위주로 배지를 통해 자신의 브랜드를 표현하고 사회 이슈를 공유하는 흐름이 생겼다”며 “일반의 후원을 받아 배지를 제작하고 판매하는 ‘배지 프로젝트’가 지난해 말부터 증가추세이고 검색어 순위에서도 ‘배지’는 상위를 차지한다”고 전했다. 배지 다는 공간을 따로 갖춘 ‘배지 백’이나 수집가를 위한 ‘배지 액자’ 등 파생상품도 등장하고 있다. 배지 도안 대로 금속을 찍어내는 영진금속 윤인식 대표는 “요즘 세월호 배지뿐 아니라 다양한 배지 주문이 늘어 일손이 딸릴 지경”이라고 말했다.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박미소 인턴기자

배지는 시안-금형-단조-연마-도금-채색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서울 을지로의 한 공업사에서 윤인식씨가 배지를 제작하고 있다.
배지는 시안-금형-단조-연마-도금-채색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서울 을지로의 한 공업사에서 윤인식씨가 배지를 제작하고 있다.
최빛그림씨가 모은 배지들. 최빛그림씨 제공
최빛그림씨가 모은 배지들. 최빛그림씨 제공
자켓에 다양한 배지를 달기도 한다. 남선우씨 제공
자켓에 다양한 배지를 달기도 한다. 남선우씨 제공
다양한 배지가 달린 에코백. 구단비씨 제공
다양한 배지가 달린 에코백. 구단비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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