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랑방은 여성복 담당 알버 엘바즈의 후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디자이너 부시라 자라를 인선했다. 엘바즈는 오랜 역사의 패션 하우스인 랑방을 2001년부터 맡아 조용하고 친숙한 느낌의 브랜드를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브랜드로 키워냈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소문에 휩싸여 물러났다.
자라도 16개월 만인 이번 시즌을 끝으로 자리를 내놓게 됐다. 오래된 패션 하우스치고 매우 빠른 인력 교체가 아닐 수 없다. 자라는 활발하게 활동하며 좋은 평가를 받은 데다 오랜만에 랑방을 책임진 여성 디자이너다. 또 랑방에 집중하겠다며 자기 브랜드의 컬렉션을 중단하는 등의 선택으로 안팎의 관심을 끌었지만,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매출이 시원치 않거나 컬렉션 평가가 좋지 않거나, 즉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면, 예컨대 디올의 오너인 디올은 스스로 책임지면 됐을 것이다.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고 훨씬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고급 패션 산업의 초창기 자기 이름으로 브랜드를 만든 디자이너는 패션 하우스 그 자체였다. 사업이 커지면서 경영을 전담하는 사람이 참여했지만 중심은 언제나 디자이너였다. 상황은 변했다. 패션이 큰 사업이 되면서 전문 기업들이 뛰어들었고, 규모가 커지면서 오너가 바뀌었으며, 경영이 정교해졌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내건 디자이너들이 은퇴하거나 사망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사라져도 브랜드의 가치는 그대로 남았다. 그만한 브랜드 가치를 새로 쌓으려면 엄청난 비용이 필요하다. 그래서 브랜드를 이끌 새로운 사람을 데려다 쓰는 전략이 생겨났다. 그러면서 대형 패션 하우스를 어떤 인물이 새로 맡게 되는지는 패션계의 중요한 뉴스가 됐다. 그런 와중에 구찌를 살려 낸 톰 포드, 디올 옴므를 띄운 에디 슬리먼, 디올을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으로 만들고 있는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등의 일화가 등장했다. 타인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이끄는 스타 디자이너도 나왔다.
새로운 브랜드에 사람 이름이 붙는 경우가 사라진 건 아니다. 하지만 대형 브랜드와 경쟁하거나 틈새를 찾아 내려면, 전문 기업이 투자하고 경영을 맡는 것이 좋은 길이다. 대부분의 브랜드가 큰 기업에 속해 있는 이유다. 사람 이름을 딴 브랜드를 둘러싼 재미있는 일도 벌어진다. 브랜드 존 갈리아노는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가 론칭했다. 그는 2011년 프랑스 파리의 카페에서 유대인 혐오 발언을 한 사실이 알려져 퇴출됐다. 그런데도 모기업인 LVMH는 브랜드 지속을 결정하고 디자이너 빌 게이튼에게 디렉터를 맡겼다. 이후 꾸준히 컬렉션을 내놓고 있다.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는 2014년 메종 마리지엘라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패션계에 복귀했다. 브랜드 존 갈리아노와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는 둘 다 현역이지만,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관계다.
랑방은 올리비에 라피두스가 이끌게 됐다. 가격을 조금 내리고 더 많은 이들에게 노출되는 프랑스 식 마이클 코어스를 꿈꾸고 있다는 소문도 있고, 인터넷 기반의 쿠튀르 사업을 시작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랑방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패션계의 주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디자이너가 옷도 잘 만들고, 장사도 잘하고, 시대의 흐름에도 전혀 뒤처짐이 없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천재성의 낭만’ 같은 걸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죽는 순간까지 업데이트를 거듭하면서 패션의 생명인 과감함과 신선함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인력 교체가 브랜드 생명을 연장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자기 이름을 붙인 브랜드라 해도, 본인을 포함해 ‘대체 불가능한 인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시대라는 얘기다.
패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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