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은 ‘헌법의 생일’ 제헌절이다. 제헌절은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제 1호 ‘제헌 헌법’이 제정된 이래로 69년째 생일을 맞이하고 있다.
헌법은 국가의 통치 조직 및 운용의 근간을 규정한 법이자 시민들의 기본 권리를 보장하는 방패막 이었다. 동시에 일반 법률과 충돌할 경우 우선적 지위를 가지는 최고 상위법이라는 특징 때문에 과거 정치인들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악용되기 일쑤였다.
총 9번의 개헌을 거치며 오늘 날의 제6공화국 10호 헌법에 수렴하기까지 개헌의 다사다난한 역사를 짚어 봤다.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제 1호 헌법 탄생… 대통령 중심제 기틀 마련
1948년 7월 17일 국회에 의해 대한민국 제 1호 헌법이 제정됐다. 제헌 헌법은 전문에서 3·1 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을 건립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헌헌법의 골자는 ▦대통령 중심제 ▦대통령∙부통령 국회 간접선거 ▦대통령 임기 4년∙1회 중임 가능 등이다.
헌법이 제정되고 3일 뒤인 7월 20일 최초로 대통령∙부통령 간접 선거가 실시됐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초대 부통령으로는 이시영이 선출됐다. 헌법이 제정되고 대통령∙부통령이 취임함으로써 제 1공화국이 본격 출범한 것이다.
제1차 개정(1952년): 폭력 속에 직선제로… 전쟁만큼 살벌했던 ‘발췌 개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번째 헌법 개정은 난중(亂中)에 이뤄졌다. 대통령 간선제로 재선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1년 신당 조직을 추진하고 같은 해 11월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승만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반발한 국회가 내각책임제 개헌카드를 들고 나서자 공포 분위기가 조성됐다. 관제데모∙국회의원 납치소동이 벌어지고 부산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된 것이다. 결국 1952년 7월 4일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피난 국회에서 경찰, 군대, 폭력배 등을 동원해 토론 없는 기립 표결로 대통령 직선제, 양원제, 국무위원 불신임제 등을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이 통과된다(찬성 163, 반대0, 기권 0).
발췌개헌이란 명칭은 여당 안과 야당 안을 발췌해 마련한 개헌안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 해 7월 7일 제1차 개정 헌법이 공포되고, 이 발췌 개헌에 따라 1952년 8월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제2차 개정(1954년): 숫자의 아전인수격 해석 ‘사사오입 개헌’
1954년 5월에 실시된 제3대 총선거에서 다수를 차지한 여당 자유당은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꾀하기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을 주요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헌법 개정은 출석 국회의원 3분의2 찬성을 얻어야 가능한데 당시 재적 국회의원 203명 중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으로 헌법 개정에 필요한 인원 136표에서 1표가 부족해 부결됐다. 하지만 다음 날 자유당이 203명의 3분의2인 135.333…의 사사오입(넷 이하는 버리고 다섯 이상은 올리는 계산법)의 논리에 따라 135명이라고 억지주장해 개정안이 가결된다. 덕분에 1956년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3선에 성공한다.
한편 이 개헌파동을 계기로 개헌에 반대한 범야당 연합 모임인 ‘호헌동지회’가 구성 돼 민주당 창당의 초석이 마련됐다.
제3차∙4차 개정(1960년) : 4∙19 혁명 이후 국가재정비
독재 대통령의 식을 줄 모르는 야욕에 분노한 민심이 결국 거리로 뛰쳐나왔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대한 반발로 4·19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혁명 후 일주일 만에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내고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같은 해 6월 성난 민심에 보답하듯 권력 구조를 광범위하게 손본 3차 개헌이 단행됐다. 이로써 ▦내각책임제 ▦복수정당제도 보장 ▦헌법재판소 설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제 채택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 제4호와 함께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같은 해 11월 반민주행위자처벌에 관한 부칙조항 삽입을 위해 4차 개헌, 이른바 ‘소급입법개헌’이 이뤄졌다. 이번 개헌의 목표는 3·15부정선거 관련자 및 부정축재자들을 소급해 처벌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해 부정선거, 부정축재를 비롯한 사회악을 이 땅에서 근절하는 것이었다. 개정헌법에 따라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가 설치됐고 ▦부정선거관리사건 ▦부정선거 ▦부정선거지령사건 ▦부정선거자금사건 ▦정치깡패사건 ▦발포명령사건 등의 분야를 다룬 혁명재판이 진행됐다.
제5차 개정(1962년) : 서슬 퍼런 군부독재의 기틀 마련
4월 혁명의 불씨는 오래가지 못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 중심의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군인들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국회와 지방의회를 해산한 쿠데타 세력은 장면 국무총리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은 뒤 군사정부를 수립했다.
1962년 11월 민정이양을 약속한 군부의 헌법개정안이 국가재건최고회의(5·16군사정변 주체세력의 국가최고통치의결기구)에서 의결된 후 12월 17일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 26일 공포됐다. 5차 개헌안의 주요내용은 ▦대통령제 채택(임기 4년) ▦소선거구제 채택 ▦국회의 단원제와 정당국가화에 따른 국회활동 약화 ▦헌법개정에 대한 국민투표제 채택 등이다.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공화당의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같은 해 12월 헌법개정안이 효력을 발휘하면서 제3공화국이 정식 출범했다.
제6차∙7차 개정(1969년, 1972년) : 대통령 3선∙유신헌법…대한민국 헌정사 먹구름
개헌은 또다시 독재자의 권력 연장의 도구로 사용됐다. 1969년 추진된 ‘삼선개헌’은 박정희 정권이 정권 연장을 위해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한 것을 말한다. 이번 개헌은 ▦대통령 3기 연임 허용 ▦대통령 탄핵소추결의 요건 강화 등을 포함하며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비중을 뒀다.
당시 정부여당은 이 개헌안을 통과시키고자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국회본회의장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반대파 의원들을 피해 개헌 지지 의원들이 오전 2시에 국회에 몰래 모여 개헌안을 변칙통과 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비밀 투표는 무효라는 야당과 학생들의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개헌안은 10월 17일 국민투표에 부쳐졌고 65.1%의 지지로 가결됐다. 삼선개헌에 힘입어 1971년 제 7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 대통령은 본격 장기 집권에 돌입한다.
1972년 10월 17일, 정권유지에 어려움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제4공화국을 수립한다. 바로 ‘10월 유신’이다.
제4공화국의 헌법인 유신헌법의 주요 특징은 ▦법률유보조항으로 기본권 제한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 등 대통령에게 초헌법적 권한 부여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연장 ▦국회 회기 단축 및 권한 약화 ▦법관 및 일부 국회의원을 대통령이 임명 ▦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선거 등으로 대통령 권한 확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제8차 개정(1980년) : 짧았던 서울의 봄…다시 드리운 군부독재의 그늘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며 상황은 급변했다. 국회와 행정부는 개헌 작업에 착수했고 서울과 지방 곳곳의 대학생들은 거리에서 독재 타도와 민주화를 외쳤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짧았다. 1979년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9사단장 노태우 등이 군사반란을 일으키며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정치 실세로 등장한 전두환은 1980년 5월 17일 시국 수습을 명목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80년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 7년 단임제를 골자로 하는 8차 헌법 개정 작업을 진행하며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제9차 개정 : 군부독재의 종말…87체제의 시작
1987년 박종철 고문사망사건과 4ㆍ13 호헌 조치를 계기로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난다. 6월 26일 거행된 국민평화대행진에는 100여 만 명이 시위에 나설 정도였다. 민주화 요구를 더 외면할 수 없던 군부 세력은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6.29 선언과 함께 시국을 수습하기에 이른다.
같은 해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고 29일 공포된 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 및 5년 단임제 ▦대통령 비상조치권∙국회해산권 폐지 ▦국정감사권 부활 등이다. 이로써 제6공화국, 이른바 87체제가 수립됐다.
내년 6월 지방선거, 헌법 개정의 역사 새로 쓸까?
한국의 굴곡진 현대사와 함께 9차례 개정된 헌법이 30년만에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내년 6월 지방선거가 헌법 개정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17일 국회의사당 로텐더홀에서 열린 제69주년 제헌절 경축식에서 개헌은 국민적 요구이며 정치권의 의무임을 강조하며 “내년 6월 지방선거와 함께 개헌 국민투표를 진행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국회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12, 13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응답자 75.4%가 개헌에 찬성한다고 했다. 찬성 이유로는 ‘헌법을 개정한 지 30년이 지나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라는 응답이 41.9%로 가장 많았고, 반대 이유로는 ‘헌법의 문제라기보다는 헌법 운용의 문제이기 때문’라는 응답이 44.8%를 차지했다.
진은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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