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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에 정치인이 끼면 안되죠"

입력
2017.07.1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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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1월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민들이 총리 퇴진 시위를 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지난 2009년 1월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민들이 총리 퇴진 시위를 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시민들은 권력을 남용한 정치인들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수도 한가운데에서는 연일 최대 규모의 시위가 이어졌다. 국민 동의 없이 세금을 쓰려던 국가지도자는 결국 사퇴했다. 2009년 금융위기 당시 아이슬란드에서 일어났던 사태는 지난해 ‘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됐던 우리나라의 촛불시위 상황과 유사했다.

아이슬란드는 당시 국가 최대의 경제위기를 겪었다. 국유화된 아이슬란드 대형은행들의 무리한 확장에서 비롯된 줄부도 때문이었다. 당시 은행들의 부채 규모는 아이슬란드 국내총생산(GDP)의 11배인 2,000억 달러를 넘었다. 실업률과 물가가 급상승하자, 집권당은 국민 세금으로 국가채무를 갚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냄비와 솥을 두드리며 ‘주방용품 혁명’에 나섰고, 당시 게이르 하르데 총리는 결국 물러났다.

우리보다 먼저 시민혁명을 이뤄낸 아이슬란드에서 선택한 다음 단계는 ‘개헌’이었다. 이들은 사회관계형서비스(SNS)로 ‘크라우드소싱(대중참여)’ 개헌을 시도해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완벽한 ‘직접민주주의’의 구현이었다. 약 3년간 이어진 개헌은 마지막 단계에서 국회의원들의 반대로 비준되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헌법의회’에 참여했던 토르발더 길파손 아이슬란드 국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실패’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국민의 75.4%(관련기사보기)가 개헌에 찬성하는 지금, 민주적 개헌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길파손 교수와 이메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난 2010년 아이슬란드 개헌작업을 위해 토르발더 길파손(오른쪽) 아이슬란드대 교수 등을 포함해 국민투표로 선출된 ‘헌법의회’ 의원들이 레이캬비크 헌법의회 사무실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헌법의회 페이스북ㆍ길파손 교수 제공.
지난 2010년 아이슬란드 개헌작업을 위해 토르발더 길파손(오른쪽) 아이슬란드대 교수 등을 포함해 국민투표로 선출된 ‘헌법의회’ 의원들이 레이캬비크 헌법의회 사무실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헌법의회 페이스북ㆍ길파손 교수 제공.

Q. ‘시민개헌’ 과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다면?

“아이슬란드 국민들에겐 경제적ㆍ사회적 평등을 강조한 새로운 헌법이 필요했습니다. 이전 헌법은 1944년 덴마크로부터 독립할 때 만들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민이 혁명을 이뤄낸 만큼 헌법 내용도 시민이 결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겼습니다. 결국 2010년 국민을 대표할 ‘헌법의회’ 의원 25명을 선거로 뽑았고, 저도 이들 중 하나로 참여했습니다.

헌법위원들은 SNS를 통해 국민의 의견을 모았고, 이를 바탕으로 2011년 7월 새 개헌안을 마련해 의회에 제출했습니다. 2012년 국민 66.3%가 개헌안에 찬성한다는 것을 국민투표로도 확인했지요. 하지만 마지막 관문인 의회 비준 과정에서 보수 야당이던 독립당이 표결을 무산시켜 결국 개헌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국민들은 ‘국회가 시민 헌법을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Q. 헌법이 비준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아닌 일부 재벌들을 대표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국회의원들 중 일부는 아이슬란드의 기간산업인 어업 회사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국민 개헌안에는 ‘아이슬란드 어업 자원은 국민들에게 귀속돼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를 반대한 기업들이 국회를 압박한 거죠.”

Q. 개헌에 SNS를 이용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헌법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개헌을 국회의원들의 손에 맡긴다면, 그들은 일부 이익집단들의 의견만 대변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모두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그리고 ‘집단지성’의 힘을 빌리기 위해 SNS를 이용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헌법의원들은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국민의 의견을 받았습니다. 아이슬란드 국민은 물론 아이슬란드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도 참여가 가능했습니다. 사람들은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하면서 헌법안 만들기에 참여했습니다. 우리 헌법의회 역시 사람들의 제안을 심사하면서 이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터넷으로 생중계 했습니다.”

토르발더 길파손 아이슬란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2010년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토르발더 길파손 아이슬란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2010년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Q. SNS상에서 토론을 방해하는 사람이 등장하거나 악플이 달리진 없었나요?

“처음에는 저희도 그 부분을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람들의 댓글은 대부분 공손하고 유익했습니다. 다른 SNS상에서 볼 수 있는 악플이나 비방은 달리지 않았습니다. 개헌은 중요한 이슈인 만큼, 사람들은 국민 개개인으로서 일조하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악플보다 더 중요했던 이슈는 온라인에서 특정 의견들이 과소대표되거나 과대표되는 경우를 보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아이슬란드는 인구 33만 여명의 작은 나라여서 수월했지만, 한국처럼 인구가 많은 나라는 각 의견들을 동등하게 반영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Q. 한국 역시 개헌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이슬란드의 실패 경험에서 한국이 배울 점은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개헌 작업에 정치인이 참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개헌의 목적은 과거 정치가 해왔던 악습을 바꾸는 데 있습니다. 만약 개혁 대상인 정치인들에게 헌법개정을 맡긴다면 이들은 스스로에게 유리한 조건만 선택할 겁니다. 2012년 국회의원들의 반대로 시민헌법을 비준하지 못한 우리의 경험이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그러나 스스로의 경험이 ‘실패’라고 보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반드시 정해진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국민들은 2012년에 완성했던 새 헌법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비준하려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총선에 ‘새 헌법 비준’을 공약으로 내세운 ‘해적당’이 원내 제2정당이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국민 모두가 원하는 개헌을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난해 한국이 지켜낸 민주주의의 가치를 새 헌법에 담기 위해선, 국민들이 앞장서서 개헌을 이끌어야 한다고 봅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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