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 퀵 보이스로 연결되오니~~’
김학범(57) 전 성남FC 감독 휴대폰은 365일 중 300일은 꺼져 있다. 주로 외국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명 선수 출신이지만 지도자로는 한국 최고 지략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별명도 알렉스 퍼거슨(76)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을 빗댄 ‘학범슨’이다. ‘연구하는 사령탑’이기도 하다. 프로 감독 때도 시즌을 끝낸 연말이면 늘 유럽과 남미로 갔다. 남들이 휴가를 즐길 때 손수 차를 몰고 프로 경기와 훈련장을 찾아 다녔다. ‘야인’일 때는 두말할 것도 없다. 유소년 훈련 프로그램까지 꼼꼼하게 훑어봐야 직성이 풀린다.
지난해 9월 성남 지휘봉을 내려놓은 김 전 감독은 그 해 12월부터 스페인에 한 달 이상 있었다. 올 초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떠나 두 달 반 이상 머물고 6월에 돌아왔다. 지난 12일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김 전 감독은 유럽과 남미의 프로경기를 수 없이 관전하며 점유율 축구의 ‘덫’에 걸린 한국대표팀이 떠올랐다고 한다.
점유율 축구의 대명사는 리오넬 메시(30ㆍ바르셀로나)가 소속된 FC바르셀로나다. 점유율을높여 경기를 지배하면 당연히 승리할 확률도 커진다. 울리 슈틸리케(63ㆍ독일) 전 한국대표팀 감독도 점유율을 늘 강조했다. 하지만 모든 팀이 바르셀로나 같은 축구를 구사하진 못한다. 슈틸리케호도 마찬가지였다. 김 전 감독이 지적한 이유는 간단하다.
“바르셀로나는 선수 전원이 순식간에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는 능력을 지녀 점유율 축구 위력이 크다. 한국은 다르다. 볼을 오래 가져도 백패스, 횡패스만 하니 ‘패스하다 날 샌다’는 비판을 듣는다.”
김 전 감독은 최근 몇 년 동안 스페인에 갈 때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AT마드리드)와 세비야FC 축구를 관심 있게 봤다. ‘호화군단’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에 못 미치는 선수로도 매 시즌 그들과 대등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상위권을 유지하는 비결이 궁금해서다. 그는 “AT마드리드, 세비야 축구는 전방 압박과 빠른 공수전환, 공격수의 강력한 수비 가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르헨티나 프로 클럽들도 두 팀과 비슷한 축구를 하는 걸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AT마드리드는 디에고 시메오네(47)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고 세비야는 얼마 전까지 호르헤 삼파올리(57) 아르헨티나 축구대표팀 감독이 이끈 것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둘 다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그 곳에서 한국 축구의 나아갈 길도 봤다. 김 전 감독은 “한국도 개개인 능력은 세계 수준과 거리가 있다. AT마드리드나 세비야 같은 축구를 접목하면 국제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라며 “그러려면 강한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AT마드리드나 세비야가 세계적 수준의 피지컬 코치와 노하우를 보유한 건 우연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김 전 감독 이야기가 아주 특별하거나 새롭진 않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수많은 경기를 보고 직접 느낀 건 천지 차이다. 지난 수 년 간 AT마드리드와 세비야 경기, 훈련을 봤지만 갈 때마다 새로웠다. 이번에 몇 년 만에 해답을 찾은 셈”이라는 그의 말은 한국 축구가 곱씹어 볼만하다.
김 전 감독은 요즘 한국 축구를 주도하는 젊은 지도자들에게 쓴 소리도 잊지 않았다.
“요즘 후배들은 외국에 나갈 생각을 안 한다. 나이만 젊으면 뭐하나. 생각이 젊어야 신선한 축구를 펼칠 수 있다. 계속 나가서 많은 경기를 보고 피부로 느끼고 배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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