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 암스트롱의 바울 다시 읽기
카렌 암스트롱 지음ㆍ정호연 옮김
훗 발행ㆍ264쪽ㆍ1만5,000원
기독교에서 페미니스트의 주된 표적 가운데 하나는 신약의 기초자, 사도 바울이다. 성경 몇 구절 발췌한 뒤 “여성혐오자, 노예제 지지자, 악의적 권위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카렌 암스트롱의 바울 다시 읽기’는 제목 그대로 영국의 비교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이 바울의 진면목을 밝혀내는 작업이다. ‘전투적 무신론자’라 불리는 리처드 도킨스와의 BBC 공개 논쟁에서 도킨스를 순한 양으로 만들었던 인물이기도 하니, 콘텐츠 자체나 필력 면에서는 따로 덧붙일 말이 없다.
저자도 처음에는 바울을 싫어했다. 1983년 바울에 대한 6부작 TV시리즈 ‘첫 번째 기독교인’을 만들 때만 해도 시대착오적인 부분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많이 넣으려 했다. 그러나 방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바울을 더 깊이 파고 들다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바울에 비판적인 페미니스트들을 두고 “바울의 업적에 대한 공정한 평가보다 그를 미워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이들”이라면서 “설득력 있고 결정적인 자료를 외면하는 건 학자로서 비이성적 태도”라고 쏘아붙여뒀다.
역설적이게도 이 책의 묘미는 단지 ‘바울 옹호론’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신약에 실린 바울 서신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결과 같은 건 이제 어느 정도 알려져 있거니와 최고의 종교학자로 꼽히는 저자가 찬찬히 설명해뒀으니 쭉 읽어나가면 된다.
그 보다 이 책의 진짜 매력은 담담한 역사적 관점이다.
바울의 가장 큰 공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에서 전 세계인의 종교가 되도록 했다는 데 있다. 이민족에 개방적인 바울의 태도와 이에 감읍한 이민족의 회개 때문이었을까. 저자는 기독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이민족들을 두고 이리 써뒀다. “그들은 제국에서 예외성을 인정받은 민족집단인 이스라엘과 연계하여 로마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렇기에 할례와 유대율법을 안 지켜도 된다고 하는 바울의 개방적 태도는 오히려 기괴한 얘기였다. “상당수의 이교도들이 유대교의 의례법을 부담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매력적이라고 보았고, 바울의 개종자들은 그 율법들을 기꺼이 따르려고 했을 뿐 아니라 그 율법들에 열정적으로 매달렸던 것 같다.” 원리주의자는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에서 나온다.
후대의 바울에 대한 왜곡 또한 ‘마초남성동맹의 엄청난 음모’ 때문이 아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의 종말을 철저히 믿었다. 그런 바울이 죽자, 남은 이들은 로마 제국과의 공존을 모색해야만 했다. “이제 그리스도의 재림은 무기한 연기되었기 때문에 예수운동이 살아남으려면 바울의 급진성을 억제해야 한다”는 정치적 고려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정작 저자는 바울의 ‘악영향’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로마 제국에서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얘기하려다 보니 로마 황제에 대한 비유를 손쉽게 끌어다 쓴 것이다. “세속적 권위를 폐위시키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관점은 그리스도를 정복자 황제가 돌아오는 것으로 그렸다.” 지금도 교회에서 널리 쓰이는 ‘하나님의 아들’, ‘주’, ‘복음’ 같은 용어는 원래 로마 제국이 황제를 신격화하기 위해 썼던 표현이다. 로마인들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 쓴 수사학적 방법이었는데, 이게 그만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공인 이후 기독교가 제국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이는 계기가 된다.
결국 바울은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일종의 물음표 같은 인간이었던 셈이다. 바울은 왜 그 모든 오해들을 견뎌가며 악전고투를 벌였을까. 저자는 십자가의 의미를 꺼내 든다. 실제 신약을 읽어보면 바울은 십자가의 의미를 무척 강조한다. 하나님의 독생자처럼 고귀한 분이 참혹하게 죽어서?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당시 유대 율법은 매장을 강조했다. 십자가에 매달려 사체가 들짐승에게 뜯기는 십자가형은 참혹해서라기보다는, 더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이어서 외면당했다. 그래서 4대 복음서는 “제자들이 어떻게 로마 당국을 설득해서 매장을 허락했는지 설명하는 정교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며 이는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통하기도 했다. 4개 복음서 저자들조차도 예수의 죽음이 더럽고 수치스럽지 않다고 변명하는데 열중한 셈이다.
바울은 이 죽음을 완전히 거꾸로 읽었다. 더럽고 수치스럽게 죽은 예수를, 하나님은 자신의 우편에 앉혔다.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 기준’이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바울은 성별ㆍ민족ㆍ인종 등 세속의 구분을 뛰어넘는, 보편적 사랑을 읽어냈다. 실제 바울의 제자를 자처한 마르키온파는 초기 기독교 집단 가운데 가장 평등했던 신앙공동체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 반전이 하나 더 있다. 저자는 초기 기독교에 대한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당시 십자가형은 아주 일반적이었으며, 예수가 매달렸을 때 제자들은 도망가느라 예수가 죽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예수의 죽음 자체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그저 그렇고 그런 수많은 죽음 중 하나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예수를 죽이려 비밀회의가 열리고 빌라도 총독이 살려줄 기회를 찾으려 노력할 일 조차 없었다고 보는 게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성경의 드라마틱한 묘사는 후일 예수를 드높이기 위해 옛 예언에 맞춰 정교하게 짜맞춰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시각은 기독교의 토대를 허무는가. 아니면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신성모독인가. 그렇지 않다. 그저 그렇고 그런 죽음이라 해도, 거기에서 십자가를 ‘차별 없는 사랑’라는 뜻으로 읽어낸 이들이 있고, 그 읽어냄을 지키기 위해 온 몸을 던진 이들이 있다. 그 총합이 기독교이며 바울은 1번 타자였다. 성경의 모든 구절은 오직 사랑의 원칙 아래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만 하고, 그렇기에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은 뒤 성경 구절을 핑계 삼아 타인들을 경멸하고 모욕하고 배제하는 이들이야 말로 가장 이단적이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소신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확인해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번 토요일, 퀴어 축제가 열린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