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개연성 떨어져 보이는 이야기라 해도 시치미 뚝 떼고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글솜씨 때문에 자꾸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 이 책은 이제 막 읽기 시작한 거라 아직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문장이 더 간결하고 세련되어진 것 같아요.”
12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만난 직장인 박미리(35)씨는 ‘기사단장 죽이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날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68)의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가 서점판매를 시작했다. 하루키 책을 보려는 이들이 서점에 줄이었다. 하루키 태풍의 상륙이다. 수십억원의 선인세가 지급됐다는 얘기가 나도는 상황에서 하루키 태풍의 지속 여부가 관심이다.
책은 1ㆍ2권 합쳐 모두 1,200쪽에 이르는, 읽기 쉽지 않은 분량이다. 그럼에도 ‘기사단장 죽이기’는 한국어판 발간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하루키는 지난 10여년간 한국 시장에서 교보문고에서만 100만권을 팔아 치울 정도로 탄탄한 고정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주 독자층이 30~40대라는 데서도 하루키 태풍의 위력을 감지할 수 있다. 교보문고는 30대 비중이 45.5%, 40대 비중이 30.8%라 밝혔다. 알라딘 역시 30대 비중이 43.3%, 40대는 24.5%를 기록했다.
20대 때 하루키 작품을 읽었던 ‘하루키 키드’들이 여전히 그의 소설을 사보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알라딘 해외소설 담당 최원호 MD는 “하루키 책 구매자들을 분석해보면 평균 연령이 완만하게 올라가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는 옛 20대 독자들의 여전히 하루키 책을 구해보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루키가 7년 만에 내놓는 장편 신작으로 일본에서 발간됐을 때도 “하루키 월드의 집대성” “하루키의 베스트앨범”이라는 격찬을 받으면서 초판 부수만 130만부를 찍을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또 ‘난징대학살’에 대한 서술 문제 때문에 우익과 마찰을 빚었다는 사실이 부각됐다. 지난 장편 ‘1Q84’ 이후 하루키 작품은 사회성과 판타지가 강화됐다는 평을 받아왔으니, 그가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언급할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도 증폭됐다.
이런 기대감은 폭발적인 예약 판매로 드러났다. 인터넷서점 예스24에서는 예약 판매만으로도 ‘기사단장 죽이기’ 1ㆍ2권이 베스트셀러 1ㆍ2위에 나란히 올랐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기사단장 죽이기’의 예약 판매량은 4,979권으로 전작 단편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1Q84’의 3배를 넘어섰다. 교보문고에서도 예약 판매 부수가 1ㆍ2권 합쳐 9,000부에 이르렀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발간 즉시 베스트셀러 목록에 안착하는 유명 작가들의 소설들도 예약 판매 부수가 500여부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에 비하자면 9,000여부는 대단한 숫자”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기사단장 죽이기’를 발간한 문학동네는 1ㆍ2권 15만 세트, 모두 30만부를 인쇄해뒀다. 예약 판매 반응을 봤을 때 200만부가 팔린 하루키의 전작 ‘1Q84’보다 초기 판매 속도가 더 빠를 것으로 내다봤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책 판매부수 (2010년 이후)
※자료: 예스24
소설 자체로는 ‘하루키스럽다’에 더 강조점이 가 있다는 게 중평이다. 1권 ‘현현하는 이데아’, 2권 ‘전이하는 메타포’로 구성된 이번 소설에서도 적당한 판타지와 성애 묘사, 음악ㆍ문학ㆍ술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 등 하루키의 특징들이 잘 버무려졌다. 소설의 뼈대는 아내의 갑작스런 이혼 통보 등으로 인생의 부침을 겪고 있던 36세 초상화가가 유명 화가였던 친구 아버지가 숨겨둔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 뒤에 숨겨진 비밀을 캐나가는 과정이다. 그림 속 기사단장이 현실로 튀어나온다는 판타지적 장치도 있다. 이렇게 캐어 들어간 비밀의 배경엔 나치와 중일전쟁 등 2차 세계대전의 역사가 깔려 있다. 난징대학살에 대한 언급도 이 과정에서 나온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역사 문제를 다루기보다 다양한 장치 가운데 하나로 지나간다는 게 일반적 평이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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