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물고 쉬며 잠자기는 인간 삶의 기본 요소입니다. 비바람과 추위와 더위를 피하면 그만이었던 시대는 오래 전 막을 내렸습니다.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하는 집과 공간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는 때입니다. 새 코너 ‘집 공간 사람’(‘집공사’)은 건축 이야기로 독자 여러분을 즐겁고 상쾌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건물의 벽면으로 둘러싸여 만들어진 안마당. 중정은 최근 지어지는 단독주택에서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인기 요소다. 수평으로는 막히고 수직으로는 열린 중정은 아파트 같은 집합주거에서 구현할 수 없는 대표적인 구조로, 집 안에 하늘과 바람, 비를 끌어들여 콘크리트 위에서 태어난 세대에게 이색적인 공간감을 선사한다.
올해 젊은건축가상을 수상한 서재원ㆍ이의행(에이오에이 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 건축가가 충북 음성에 설계한 ‘디귿집’은 중정의 기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듯 하다. 디귿집 한가운데 놓인 장방형의 중정은 끌어들이기도, 떨어뜨리기도, 모으기도, 미끄러뜨리기도 한다.
떨어뜨리는 중정
디귿집은 원래 3대가 사는 집으로 계획됐다. 어린 아들 둘을 키우며 각자 다른 곳에서 일하던 부부는 남편의 고향인 음성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줄곧 아파트에서만 살다가 처음으로 내 집을 짓게 된 아내는 아이들이 뛰놀 공간이 있는 집, 시선이 사방으로 통하는 집, 그리고 언젠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집을 원했다.
“주변이 온통 논이라 뛰놀 곳이 많을 것 같지만 정작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는 곳은 드물어요. 내부뿐 아니라 외부에도 우리만의 공간이 있었으면 했고요, 시부모님이 더 나이가 드시면 함께 살 수도 있기 때문에 두 세대가 불편 없이 공존할 수 있는 집을 바랐습니다.”
건축가들이 그린 것은 디귿(ㄷ)자 평면의 집이다. 전통 한옥에서도 볼 수 있는 디귿자집은 가운데 일(–)자형 실의 양 옆으로 두 개의 실이 뻗어 나와 그 사이에 중정을 품는다. 한옥에선 돌출된 실보다 가운데 실이 더 크거나 같지만, 이 집에서는 돌출부가 압도적으로 크다. 건축가들은 남북으로 긴 땅의 형태를 따라 돌출된 실들을 길게 뺀 뒤 서쪽 실엔 부부와 자녀들의 방을, 동쪽 실엔 시부모의 방과 부엌을 배치했다. 중정을 사이에 두고 완전히 분리된 두 세대는 가운데 거실을 통해 다시 만난다.
“각자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데는 미음(ㅁ)자 보다 디귿자 구조가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미음자는 모든 실이 통해 있어 움직이다 보면 내부에서 만나게 되는데, 디귿자는 한쪽이 단절돼 있어 일부러 거실로 가지 않는 한 마주할 일이 없거든요. 혹시 있을 시선의 간섭을 방지하기 위해 부부 침실도 서로 반대쪽에 배치했습니다.”
뚫려 있는 중정의 남쪽엔 큰 대문을 가진 담을 세워 막았다. 대문을 열면 깊숙한 안마당이 되는 중정은, 문을 닫으면 온전히 가족 만의 공간이 된다. 건축가들은 중정과 면한 내벽에 대문 크기만한 창문을 여러 개 내서, 집의 어디에 서 있든 중정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처음엔 안쪽 벽을 전부 유리로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에너지 문제도 있고 집이 다 열려 있으면 좀 재미가 덜 할 것 같아서 벽과 창이 교차하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하지만 창이 커서 시선이 통하는 데는 무리가 없어요. 주방에 있는 부모가 복도를 뛰어 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대신 거실 쪽엔 전면에 창을 내서 중정을 가장 풍성히 즐기는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거실에서 바라보는 중정은 이 집에서 누릴 수 있는 풍경의 하이라이트다. 뾰족하게 솟은 흰 콘크리트 담장과 거기 뚫린 동그란 구멍, 동네의 가로등 역할을 하는 작은 조명도 볼거리지만, 무엇보다 눈 앞에 길게 펼쳐진 중정은 일반 살림집에선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감각을 선사한다. 여기에 대문을 열면 시야는 수백 미터 앞의 논까지 확장된다. 건축가들은 거실 뒤쪽에도 큰 정방형의 창을 뚫어 멀리 보이는 칠현산, 덕성산, 무이산까지 조망에 포함시켰다. “대문을 열면 집 전체가 하나로 관통됩니다. 중정은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는 폐쇄적인 공간이지만 문을 열고 닫음에 따라 극도로 개방적인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모으고 끌어들이는 중정
바깥에서 본 디귿집의 외관은 국적불명의 희한한 모습이다. 독수리 문장 같기도 하고 왕관 같기도 한 가파른 선들은, 지붕의 모양으로부터 나왔다. 디귿집을 덮은 세 개의 지붕은 모두 중정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마치 뭔가를 쏟아 내릴 준비가 된 듯한 모습이다.
“이 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공간이 있다면 중정일 겁니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여기로 모든 것이 모이길 바랐어요. 비가 오면 지붕을 타고 빗물이 떨어져 들어오고, 눈이 오면 지붕에 눈이 쌓이고, 낙엽이 지면 중정 안으로 날려 들어올 수 있게요.”
건축가들은 지붕의 기울기를 세심하게 조정해 한쪽 실에서 건너편 실을 봤을 때 지붕 마루와 하늘이 같이 눈에 들어오도록 했다. “지붕 꼭대기가 보이냐 안 보이냐는 굉장히 중요해요. 이게 개방감을 좌우하거든요. 만약 경사가 더 가팔랐다거나 평지붕이었다면 방에서 볼 때 답답하다는 느낌을 줬을 겁니다.”
큰 브이(V)자를 그리는 지붕은 다시 가운데서 솟아올라 뾰족한 모습으로 완성됐다. 일직선, 반원형 등 여러 형태를 고민하다가 선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따라가기로 했다. 지붕 재료는 내열성과 내식성이 강한 갈바륨 골강판이다. 건축 자재로 각광 받는 신소재지만, 외관은 과거 농촌 주택에 많이 쓰였던 슬레이트 지붕을 연상케 한다. 도회적인 느낌을 지우고 지역에 스며들고자 하는 시도는 집 뒤편에 만든 굴뚝에서도 볼 수 있다.
“LPG난방이라 굴뚝은 사실 큰 쓸모가 없어요. 가족들끼리 모여 고구마를 구워 먹는 정도죠. 그래도 도시에 살다가 내려 왔는데, 여기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면 좋지 않을까 했습니다.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나 어릴 때 굴뚝 있는 집에 살았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가족이 디귿집에 입주한 건 지난해 11월이다. 겨울과 봄, 여름, 세 계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구성원을 분리하기 위해 만든 중정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족들을 한데 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거실에 앉으면 지붕을 타고 미끄러져 들어온 자연이 시시각각 다른 풍경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평소엔 저희 부부뿐 아니라 아이들도 거의 거실에 나와 있어요. 바깥에 안 나가도 계절이 바뀌는 걸 실시간으로 볼 수 있으니까요. 바쁘다는 이유로 잔디도 안 심고 입주할 때 모습 그대로 뒀는데 굳이 뭘 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음성=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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