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의 일들은 약 100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제대로 밝혀진 것이 많지 않다. 영화 ‘박열’ 속 조선 최고 불량 청년 박열(이제훈 분)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의 이름 역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준익 감독은 이런 역사 속 인물들에게 눈을 맞추려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다. 전작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를 통해 송몽규라는 인물을 알게 됐다면, 이번 영화 ‘박열’에서는 박열로 들어왔다가 후미코에게 빠지게 된다.
이준익 감독은 “인간은 혼자서 세상을 살지 않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산다. 동주는 그와 같은 곳에 태어나서 같이 죽은 송몽규라는 인물과 함께 설명하지 않으면 허상을 그린 것이나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윤동주만 알고 송몽규는 모른다”라며 “박열도 마찬가지다. 영화 ‘박열’을 보면 이상한 일본 여자가 등장한다. 아마 ‘동주’에서 송몽규를 발견했을 때보다 더 충격적일 것이다. 후미코가 일본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박열과 동지적 신념을 지켰다. 그건 페미니즘이었다.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아는 지금의 우리가 봤을 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데, 그때의 박열은 느꼈을까. 나는 분명하게 느꼈다고 본다. 박열과 후미코는 ‘동지로서 함께 한다’는 동거서약에 도장을 찍는다. 면회할 때도 이것에 대해 말을 한다. 후미코를 진정으로 존중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열’의 여주인공 가네코 후미코는 그저 남자 주인공의 연인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그는 21세기인 현재 한국영화에서도 보기 힘들 만큼 시대를 앞선 인물이다. 이 인물이 가상이 아닌 실존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더욱 놀라움을 준다.
이준익 감독은 “버지니아 울프 같은 서양의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은 많지만, 아시아 여성의 근대성에 대해 이야기 해보라고 하면 대부분 머리가 하얘질 것이다. 아시아의 역사적 인물에 대해 소홀했다는 뜻이다. 이건 바람하지 않다”고 말했다.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했지만 박열은 자신의 모든 것을 후미코에게 털어놓지는 않는다. 극 초반 박열은 불령사 단체의 임무 중 하나인 폭탄 테러 계획을 후미코에게 숨기다가 나중에 들키고 만다. 후미코는 자신을 동지로 여기지 않으면 같이 못 간다며 박열의 뺨을 때린다.
이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박열은 폭탄 입수 경로를 다방면에 시도했다. 여러 사람에게 준비를 시켰지만 그 비밀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용의주도한 테러리스트의 면모다. 그래서 후미코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인데, 또 다른 불령사 조직원인 김중한과 하쓰요는 서로 공유를 한다. 흔히 남녀 간에 비밀이 있으면 사랑이 깊지 않다고 말을 하는데, 박열이 후미코를 사랑하지 않아서 비밀로 만든 것은 아니다. 대신 일본에게 끌려가서 김중한-하쓰요는 이 사실을 자백하지만, 박열은 변호사를 불러달라고 한다. 이 부분은 김중한-하쓰요 커플과 박열-후미코 커플의 차이점이다”고 설명했다.
이런 박열과 후미코의 모습을 보면 ‘박열’은 로맨스물로도 손색이 없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형무소에 갇혀 떨어져 있어 만나는 신도 많지 않다. 하지만 말 한 마디와 눈빛 하나로 로맨스를 그려낸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에로스적 사랑을 넘어서 존경과 믿음으로 묶인 운명 공동체로서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이준익 감독은 “누구나 단점은 있다. 나도 엄청나게 많다. 사랑은 그걸 알고도 하는 것이다. 이게 ‘완벽한 사랑’이다. 상대방에게 뭔가를 고치라고 하는 건 사랑이 아니다. 후미코는 박열의 본질을 알고 있다. 그의 결정과 과실을 포함해서 사랑했다. 박열도 그걸 알고 있다. 예심판사 다테마스가 심문을 할 때 ‘후미코가 나에 대해서는 뭐라고 했냐’고 묻는다, 그냥 로맨스가 아니라 플라토닉 러브인 것이다. 마주보고 일대일로 사랑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세계관을 같이 만들며 걸어가는 것이다. 마지막에 후미코가 일본 내각으로부터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해 주겠다는 서신을 받지만 찢어버린다. 박열과 공유했던 사상이 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 영화에서는 이런 것들이 로맨스 표식으로 이어진다”고 이야기 했다.
이처럼 ‘박열’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두 남녀의 감정선이 일품인 영화다. 이에 이준익 감독의 본격 로맨스물이 기다려지는 관객도 있을 터.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만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던 이준익 감독의 대표작 ‘왕의 남자’와 같은 영화는 어떨까.
이준익 감독은 “사실 로맨스를 따로 만들 의욕이 전혀 없다. 과거에 멜로 영화가 잘된 이유는 산업사회에 과도한 노동으로 일상적 로맨스가 없었기 때문이다. 로맨스는 판타지여야 한다. 하지만 요즘은 현실에서 충족이 되는데 극장에서 판타지를 볼 사람이 있겠나.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로맨스가 안 나온다”라고 대답했다.
이주희 기자 leej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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