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셔츠, 하얀 바지, 하얀 신발에 하얀 매니큐어까지. 훌쩍 큰 키에 삐쩍 마른 몸, 나른한 눈빛과 느릿느릿한 말. 세계적 산업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57)의 인상은 깐깐한 나르시스트였다. ▦제품, 패션, 건축 등 분야에서 내놓은 디자인 3,500여개 ▦세계 기업 400여곳과 협업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 미술관 14곳에 작품 영구 소장ㆍ전시 ▦‘레드닷 어워드’ 등 세계 디자인상 300여번 수상. 자기애를 감추고 굳이 겸양 뒤에 숨지 않아도 될 만한 화려한 경력이다.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라시드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디자이너다. 파란색 캡슐 알약을 닮은 파리바게트의 ‘오(EAUㆍ프랑스어로 물)’ 생수병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현대카드 VVIP 카드인 ‘더 블랙’, 애경 주방세제 ‘순샘 버블’, LG생활건강 ‘이자녹스 셀리언스’, 반도건설의 경기 동탄신도시 ‘카림 애비뉴’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10월 7일까지 열리는 ‘카림 라시드전- 스스로 디자인하라(Design Your Self)’에 맞춰 라시드가 최근 방한했다. 작품 원본 스케치, 디자인 제품, 대형 미디어 아트까지 350점을 선보인다.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쉽고 유쾌한 전시다.
‘관능적 곡선과 현란한 색’은 라시드의 디자인 언어다. 라시드를 스타로 만든 포옹하고 키스하는 모양의 소금ㆍ후추통(1995년), 400여만개가 제작되고 요즘도 하루 7,000개가 팔리는 ‘가르보’ 휴지통(199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에 영구 소장된 플라스틱 ‘온 체어’ 의자(1999년) 등 모든 작품이 그렇다. 라시드는 인터뷰에서 “곡선과 색이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 사랑한다”며 “산업혁명 이후 세상이 회색으로 통일되고 효율성을 따지느라 직선이 곡선을 밀어낸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곡선과 색으로 말하는 디자이너는 많지만, 라시드의 문법은 독특하다. 이집트인 화가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에게 태어나 이집트,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캐나다 등을 다니며 성장한 것이 모방과 관행을 거부하는 정체성으로 쌓였다. 라시드의 창의력은 “네가 보는 것을 그려라. 네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리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에서 싹텄다.
라시드는 ‘디자인 민주주의’ 주창자다. 디자인 민주주의는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싸고 실용적인 디자인이어야 한다는 뜻. “작가와 부자, 소수 팬만 열광하는 디자인은 무의미하다.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다.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 내 작품이 미술관에 전시되는 것보다 시장에 널리 유통되는 게 더 좋다. 디자인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상업주의 다작 디자이너가 된 것일까.
디자인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디자인은 단지 스타일이 아니라 경험을 흔드는 것이다. 인간의 생활 방식과 행동, 정신을 바꾸는 매개체다. 과거가 아닌 현재에서 영감을 얻어 미래로 가야 한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게 인간 본성이라면, 그걸 고쳐야 한다. 뒤를 돌아보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인간은 창조하기 위해 지구에 왔다. 요즘 관심사는 디지털이다. 비물질적 디지털 세계와 우리의 물질 세계를 어떻게 연결할지가 고민이다.” 라시드는 디지털 회화를 그린다. 붓과 캔버스 대신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그린 ‘디지팝’이 이번 전시에 여러 점 나왔다.
라시드는 몇 년 전 언론 인터뷰에서 “애플엔 있고 삼성엔 없는 것이 있다. 브랜드 정체성을 드러내는 디자인이다”고 평했었다. 생각이 바뀌었을까. “삼성은 기술을 비롯한 거의 모든 면에서 성공했지만, 디자인에 대해선 스스로 뭘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그저 모든 제품을 평범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각종 기술이 들어 있는 검정 상자만 내놓는다. 삼성이 매년 제품 1,000개를 내놓는다면, 그 중 20개만이라도 급진적이고 미친 걸 만들면 어떤가? 삼성은 매우 부자다. 뭐든 할 수 있는데 왜 아무 것도 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구단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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