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이야기 그리고 또 다른 상상
르 클레지오 지음ㆍ정희경 옮김
문학동네 발행ㆍ432쪽ㆍ1만5,500원
“창작자이기에 앞서 한 명의 여성 독자로서 한국문학에 재현된 여성비하적 요소를 찾아내는 일은 지금의 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윤이형 ‘여성에 대해 쓰기’ 중)
지금 한국 문학계에서 가장 ‘핫 한’ 이슈를 단 하나 꼽는다면 페미니즘 문학일 것이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예술계 성폭력 고발은 문학 속 ‘여혐’의 고발로 이어졌고, 단편 ‘언니의 폐경’ 장편 ‘칼의 노래’ 등에서 ‘마초적 글쓰기’를 선보였던 작가 김훈이 때마침 신작 ‘공터에서’를 출간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각종 문예지들은 우리 문학의 여성혐오와 이에 저항하는 페미니즘 문학의 경향을 앞 다투어 소개하고 있다. 작가 윤이형은 문예전문지 문예중앙 여름호에 기고한 ‘여성에 대해 쓰기’에서 우리 소설 속 여성혐오를 5가지 전형으로 소개한다.
▦여성이 인격체라기보다는 ‘비체(abject)’ 내지는 ‘분비물’처럼 묘사되는 서사 ▦남성 예술가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고 착취당한 뒤 버려지는 여성 ‘뮤즈’ 서사 ▦가정 있는 남자 주인공이 아내를 떠나 일상이 아닌 신비한 공간에 들어가면서 성녀와 창녀의 양면을 결합해놓은 듯한 ‘환상 속의 구원자’ 여성을 만나 영혼을 치유받고 돌아오는 서사 ▦생활의 의무에 완전히 무책임한 민폐 남성을 계속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착한 구 여친’ 서사 ▦처음에는 순수의 상징이었으나 순정을 짓밟히고 타락(?)하여 돈 많고 능력있는 남자를 찾아 떠났다가 초라하게 몰락해버린 ‘썅년이 된 첫사랑’을 애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성의 서사 등이다.
이런 서사의 목록을 만드는 일은 작가의 말처럼 어렵지 않다. “여성혐오적인 현실이 있기 때문에 혐오를 그리는 것”이라는 작가들의 해명도 일견 일리가 있다. 그러므로 관건은 ‘이런 일을 자각한 작가가 어떤 서사를 쓸 것인가’다.
‘작가들의 작가’ 르 클레지오의 신작 ‘발 이야기 그리고 또 다른 상상’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 같은 단편 9편을 모은 책이다.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 후 3년 만에 발표한 이 소설집에서 작가는 저항, 특히 젊은 여성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통한 저항을 말한다.
‘마리는 전라의 아프리카 여인을 정면에서 찍은 커다란 사진을 발견하고는 에스메에게 볼멘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사십 대 정도의 여인으로 정면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가슴은 묵직하게 처지고, 두 손은 커다란 엉덩이에 걸친 채 조금 벌린 투실한 두 다리 사이의 음부는 꼬불꼬불한 검은 색 음모로 덮여 있었다. “아버지가 그러는데 이게 아프리카의 초상이래.” 마리는 모욕당한 기분이었다. “네 아버지는 말을 막 하시는구나, 이건 그냥 한 여자야, 창녀일 뿐이라고.”’ (단편 ‘야마 나무’)
말하자면 (백인)남성 중심의 현실을 소설에서 그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자연 현상’처럼 그리는 게 문제라고, 현실의 억압과 폭력성을 독자가 알아차릴 때까지 고민하는 직업이 작가라고 클레지오는 9편 작품을 통해 줄기차게 말하고 있다.
9편 중 5편의 화자가 여성이다. 표제작 ‘발 이야기’의 유진과 그의 딸 욀랄리, ‘바르사, 아니면 죽음을’의 파투, ‘야마 나무’의 마리 등 여주인공은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않고 이름으로만 불린다. ‘아무도 아닌’에서 작가는 전 세계 어디선가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테러를 배경으로 그 테러에 희생된 여인의 뱃속 태아의 눈으로 황막한 사막 도시들을 묘사하고, ‘우리 거미들의 삶’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거미가 그물을 치듯 온 세상에 상상의 거미줄을 치고 거미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연약하고 소외된 이들의 다층적 삶을 섬세하게 그린다.
아프리카 세네갈의 고레 섬부터 서울까지 다양한 지역의 이 “보통 젊은 여인들”(번역가 정희경)은 스스로를 긍정하거나, 자신의 삶을 선택하거나, 존엄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비극적인 상황에 놓인 여인들에게 작가는 “희망의 문을 열어둔다”. “앞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보고 뒤에서 행복의 열쇠를” 찾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발 이야기’의 유진은 남자친구 사뮈엘과 헤어진 후 그와의 추억이 서려 있는 장소를 돌아보며 자아를 찾는다. 유진의 발은 단순히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을 딛는 인생의 거죽이자, “실존의 무게가 고스란히 실려 있”는 의인화된 자기 자신이다. 삶에 모욕당하고 사랑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순간, 그래서 유진의 몸이 벼랑 끝에 선 순간에도 발은 허공으로 떨어지기를 거부하고 바닥에 단단히 붙어 있다. 그리고 몸 한가운데까지 전율을 퍼뜨리고 두 다리를 쇠기둥처럼 단단히 지탱시키며 냉혹한 삶에 저항한다.
‘그녀는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크고 더 날씬하고 더 고귀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이힐 굽이 12센티미터쯤 됐는데 돌연 바닥이 멀어지면서 가벼워졌다.’
남성의 시선으로 ‘언니의 폐경’을 묘사한 국내 소설과 대조적인, 여성이 하이힐을 처음 신었을 때 느낌을 묘사한 장면이다. 여성의 내밀한 감각, 정서까지 파고들며 작가는 말한다. “저항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소설을 쓰고자 했다.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이 내는 저항의 목소리에 대해 쓰고자 했다.” (프랑스 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11월 인터뷰에서)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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