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테니스는 귀족과 신사의 전유물이었다. 영국에서 건너간 테니스의 ‘고귀함’은 미국에서 더욱 강화돼, 버지니아주에서는 “흑인은 테니스 경기에 참가할 수 없다”는 법이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이 콧대 높은 미국 테니스의 ‘흑인 장벽’을 깬 이가 아서 애시다. 7월 6일(한국시간)은 그가 가장 권위 있는 메이저 대회 윔블던에서 우승한 지 꼭 42년이 되는 날이다.
애시는 아버지가 테니스코트 관리인이었던 덕에 다른 흑인에 비해 비교적 쉽게 테니스를 접할 수 있었다. 일찍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에서 애시의 기량을 알아보고 특집 기사로 다뤘으며 1963년에는 캘리포니아 대학교(UCLA)에서 테니스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마침내 남자테니스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에 국가대표로 발탁, 미국 테니스의 ‘흑인 금지 규정’을 실력으로 깨부순 첫 번째 흑인이 된다.
애시의 테니스 선수로서의 삶은 화려했다. 애시는 1968년 흑인 최초로 US오픈 정상에 올랐다. 1968년은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해 분노한 흑인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던 시기다. 흑백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에 흑인이 미국 최고 권위의 테니스 대회 정상에 오른 것이다. 애시는 2년 뒤인 1970년에는 호주 오픈에서도 우승해 두 번째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획득한다.
이후 5년 동안 슬럼프에 시달리던 애시는 마침내 31살에, 테니스의 본고장 영국의 윔블던 정상에 오른다. 과정은 험난했다. 애시는 1968년과 1969년 윔블던에 진출했지만 두 해 모두 준결승에서 무릎을 꿇었다. 반면 결승 상대인 10살 아래의 디펜딩 챔피언 지미 코너스(65ㆍ미국)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테니스 스타였다. 윔블던 결승 이전 세 차례 맞대결에서 코너스는 애시를 손쉽게 이겼고, 모두가 애시를 ‘한 물 간 흑인 선수’로 인식했다. 그러나 애시는 1975년 대회에서 세트스코어 3-1 역전승으로 코너스를 격파하고 윔블던 정상에 섰다. 만 31세 11개월의 우승기록은 아직도 남자 단식 최고령 우승 기록으로 남아있다.
아서 애시의 삶은 라켓을 내려놓은 후에 더욱 빛났다. 1980년 심장 관련 지병으로 은퇴 후 인권 운동가로 제2의 삶을 살았다. 애시는 1983년 심장 이상으로 받은 수술 때 수혈 받은 혈액 때문에 에이즈에 감염된다. 그러나 “집에 앉아 죽음을 생각하기 보다는 불우한 이들을 위해 활동하는 게 낫다”며 더욱 열성적으로 사회에 뛰어든다. 그는 1992년 자신의 감염 사실을 세상에 알린 뒤 에이즈 퇴치를 위한 연구소에서 활동하며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에이즈보다 흑인이라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에이즈는 나의 몸을 죽이지만 인종차별은 나의 정신을 죽인다.”
병마와 싸우던 애시는 마지막까지도 인종차별 철폐에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1993년 2월, 그가 지천명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뉴스 앵커가 그의 죽음을 전하며 눈물을 흘렸고, 당시 미 대통령 빌 클린턴은 “진정한 미국인의 영웅을 잃었다”며 그를 애도했다.
미국은 이후 US오픈이 열리는 내셔널 테니스센터 주 경기장의 이름을 ‘아서 애시 스타디움’으로 정했다. 매년 US오픈 전날에는 아서 애시 어린이 날축제를 열며, 흑인 테니스 선수이자 인권 운동가로서의 애시를 기리고 있다.
오수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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